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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May 27. 2019

#197 나는 보인다


10. 지금 일흔 두 살만 되어도 너무 좋을 것 같다


헬스를 마치고 샤워를 했다. 예닐곱 명이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공동 욕실이었다. 연령대가 높은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시간이었는지, 평소와 달리 꽤나 붐볐다. 비집고 들어가 샤워꼭지 하나를 잡았다. 즐겁게 비누질을 하는데 이상한 냄새가 확 풍겼다. 화들짝 놀라 슬쩍 돌아보았다. 뒤 쪽의 바닥. 짙은 갈색. 몸이 앙상하고 머리 숱이 거의 없는 어르신이었다. 몇 초쯤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아셨나보다. 샤워기로 물을 뿌려 닦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약한 물줄기만큼이나 느렸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핏 보아도 어르신은 여든 살이 훨씬 넘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내 앞에서 느리게 걷는 아저씨의 몸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왼쪽 팔이 조금 불편하게 흔들렸다. 풍을 맞으셨는가보다. 그런 까닭인지 예순 살이 조금 못 되어 보이는 얼굴에는 인상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문득 조금 전에 샤워장에서 본 어르신이 생각났다. 만약 그 어르신이 지금 이 아저씨의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그래도 인상을 찌푸릴까. 내 외할아버지는 일흔 다섯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일흔 두 살만 되어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세상 모두를 다 주어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시간이다.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멀쩡히 먹고 입고 자고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있어 우리는 이미 너무나 부러운 존재가 아닐까.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말하길, 어떤 이미지는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평생을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인격을 만든다고 했다. 오늘 본 모습은 나에게 아마 그런 이미지가 될 것 같다.  





11. 지금이 행복한 줄 알고, 여기가 좋은 줄 알면


여행은 사실 번거로운 일이다. 다리가 아프고 어깨는 무거운데, 일정이 있으니 쉬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돈을 쓰면서 고생하러 가는 게 여행’이라는 말은 제법 들어맞는 정의다. 뙤약볕 아래에서 거북이처럼 걸으면 집에 두고 온 편안한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그렇게 그립던 일상의 편안함은 종종 지루함으로 변한다. 일상이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서로 다른 시간들을 의미하므로 그것의 편안함은 언제든 지루함으로 표정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다리와 어깨의 고단함이 기억에서 흐려질 즈음, 일상을 탈출해 어디론가 떠날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여행을 떠나면 집이 그립고, 집에 있을 때는 여행을 꿈꾼다. 어느 자리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계속 움직인다. 이런 모습을 설명하는 적절한 단어는 아마 ‘방황’일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머물지 않는 모든 순간은 방황이다.  


그렇기에 방황하지 않는 삶이란 장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행복한 줄 알고, 여기가 좋은 줄 알면 그것이 도(道)라고 나는 배웠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그 순간에 집중할 뿐. 길 위에서는 발가락 마디까지 무거움을 느끼고, 집에서는 위와 간마저 편안함에 젖을 수 있다면 도에 가깝지 않을지. 그러므로 장소에서는 저 곳과 이 곳이 다를지라도 여행의 도(道)와 일상의 도(道)는 다르지 않다.  





12. 나는 보인다


새로운 기회는 말 그대로 매일 열린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중요한 인연이 될 수 있고, 오늘 시작해 본 일이 평생 가는 취미가 될 수 있다. 다만 문이 열리는 시점에서 우리는 그 문이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알 수 없다. 멀리 뻗은 큰 길인지, 조금 가다가 끊어지는 골목인지, 아니면 도드라지진 않더라도 오래오래 가는 오솔길인지. 7년 전 출판사 에디터 한 분이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주셨을 때는 지금 이렇게 다섯번째 작업을 같이 하고 있을 줄 몰랐고, 19년 전 친구를 따라 검도장에 발을 들였을 때는 내 프로필에 검도 유단자를 써 넣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분명히 오늘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다.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나의 인생이 바뀐 시점’이 바로 오늘이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오늘부터 담배를 줄이기 시작한다면, 오늘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다면, 오늘부터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용기를 내 본다면. 그리고 그렇게 열어 젖힌 문을 닫지 않고 계속 가기만 한다면, 몇 년 뒤에 나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 있겠는가.  


나는 보인다. 오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일과 그것이 바꿀 먼 미래가 보인다. 과거의 점들이 만들어온 지금의 내가 보이는 까닭에, 지금의 내가 만들 수 있는 미래의 나도 보인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앎이다. 앎은 믿음에 앞선다. 아는 사람은 믿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결과는 따라오게 되어 있으므로 미리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충만한 기회가 보이지 않은 것은 미래의 나에 대한 앎이 부족한 탓이고 이것이 부족한 이유는 과거와 오늘의 나를 곰곰히 이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열려있는 문들이 눈부시다.  


그리고 ‘오늘’의 다른 이름은 ‘이 순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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