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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May 29. 2019

#198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13.나는 그가 아니다


나는 한 때 하루키처럼 되고 싶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하고 네댓 시간쯤 글을 쓴다. 넉넉한 샐러드로 이른 저녁을 먹고는 소설책과 함께 맥주 한 잔을 즐기다 잠이 든다. 하루키의 일상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루키가 되고 싶지만 나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나는 한 때 스티브 잡스처럼도 되고 싶었다. 세상을 놀래킬 만한 제품을 만들고, 세상을 놀래킬 만한 프리젠테이션으로 선보이고 싶었다. “우주에 흔적을 남기자.”는 말은 훌륭하다 못해 아름다웠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잡스가 되고 싶지만 그렇게 괴팍한 성격을 가지긴 싫은데...'


그런 식이었다. 멋진 작가를 보면 그처럼 되고 싶었고, 기막힌 사업가를 보면 그처럼 되고 싶었다. 예술가도, 법률가도, 종교인을 볼 때도 그랬다. 그러나 롤모델로 삼을만한 누군가를 찾을 때마다 늘 머지않아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사람과 다른데…’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가도 아닌듯 싶었고, 그 사람처럼 된다고 해도 완전히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가 아니다. 하루키처럼 살더라도 하루키가 될 수는 없고, 잡스처럼 일하더라도 잡스가 될 수는 없다. 나는 그들과 다른 까닭에 결국 이 삶에서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른 그 누구도 될 수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이 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이미 나로서 여기 있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런 말을 했다. “어떤 개체의 정자 세포가 46개의 염색체로 이루어진 같은 세트의 작은 조각에서 23개의 염색체를 조립했다고 해도 그 개체의 정자 세포는 모두 유일한 것이다. 난자는 난소 내에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고 역시 어떤 것이든 각각의 난자는 유일하다.”


우리는 원래부터 유일한 것과 유일한 것이 만나 태어난 유일한 존재다. 올라갈 산은 원래부터 하나였다. 나는 이 산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가능한 높은 곳까지 올라갈 뿐이다. 내가 될 수 있는 최대한의 내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애초에 없었다. 나 자신으로 최대한 살아갈 것.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것은 나의 유일함에 대한 모독이다. 




14.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도쿄에 갔다가 기념으로 간직할 만한 책을 하나 사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에 대해 쓴 에세이다. 일본 서점에 일본 작가가 쓴 책을 영문판으로 진열해놓은 특별 코너가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배출한 월드 클래스 작가.’라고 자랑하는 듯 보였는데, 아무튼 히라가나조차 읽을 줄 모르는 나는 영문판을 살 수 있어서 좋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잠들기 전에 이불 위에서 몇 페이지를 맛나게 읽었다.  


어제였다. 새벽 운동을 가려고 눈을 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었다. 잠을 잘못 잤는지 등이 조금 불편했다.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뒷산을 달리는데, 한 30분 즈음이었을까. 갑자기 등이 찌릿했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듯 근육의 통증이 쭉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곳을 찾아 주저 앉았다.  


빨리 달리지도, 힘든 동작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뛰는 둥 마는 둥 움직였을 뿐이다. 잠자리에서 결렸던 자리에 무리가 간 걸까.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리나 무릎이 아닌 등이 아파서 당황스러웠고, 지금껏 아파본 적 없었던 곳이 새로 아파서 서글펐다. 나는 숨길이 좀 트인 뒤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돌아왔다.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등은 계속 끙끙 신음소리를 냈고, 시계는 아직 일곱 시니까 더 자도 된다고 속삭였다. 부득이하게 아픈 거니까 나 스스로에게 오전 반차 휴가라도 줄까 싶었다. 이부자리를 다시 펼치려는 순간, 그 위에 엎드려 읽었던 하루키의 구절이 생각났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힘들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더라도, 그래서 계속 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기에 달려있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요약’한 거라고 하루키는 덧붙이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다시 개었다. 가방을 꺼내 노트북을 넣고 씻으러 갔다.  




15.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왔던가


미련이 긴 녀석이다. 삐끗했던 등의 통증이 꽤 며칠 째 가고 있다. 물리치료를 하고 침을 50대쯤 맞고 나면 제법 괜찮은 듯 싶다가도, 자고 일어나 아침이 되면 다시 끙끙이다. 기껏 해놓은 과제물이 날아가 첫 페이지부터 새로 작업해야하는 느낌이랄까. 스무살 무렵에는 운동을 하다가 통증이 생겨도 길어야 사흘이면 깨끗이 사라지곤 했다. 일상에서는 잊고 살던 나이가 이렇게 아플 때면 저절로 생각난다.  


몸이 조금 불편하다보니 여러 가지가 말썽이다. 매일 새벽에 달리던 뒷산도 갈 수 없고, 주말에는 뛰어주겠노라 약속한 강아지 산책도 무기한 보류다. 헬스장도 며칠 째 결석 중. 하지만 모든 말썽 중에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글쓰는 작업이다. 맛사지 기구를 붙이느라 카페 대신 집에서 일하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전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5단으로 변속하지 못하는 자동차 기어가 된 것 같다. 뇌과학적으로는 당연한  현상이다. ‘아프다’는 인식이 글에 집중하는 작업 기억의 문을 불쑥불쑥 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삐그덕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써나가다 보니 새삼, 고생하는 와중에도 대작을 남겼던 훌륭한 사람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다산 정약용은 복숭아 뼈가 세 번이나 망가지면서도 20년간 500권을 작업했고, 천식이 심했던 칼 마르크스는 침대에 누워 콜록거리면서도 <자본론>을 썼다. 조정래 역시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등 통증과 싸웠는데 가난했던 에릭호퍼는 그 싸움의 대상이 아예 배고픔이었다. 다들 참 열심히도 사셨다. 떠올리고 보니 '통증이 꽤 며칠' 운운하는 내가 부끄럽다.  


역시 전업 작가인 동갑내기 친구에게 달리기를 하다가 다쳤다고 몸 조심하라 안부를 전했더니, 친구는 벌써 발목이 좋지 않다고 답을 해 왔다. 이제 ‘우리가 벌써 이런 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들어선 것일까. 난생 처음 아파본 등 덕택에 우리 몸 구석구석이 평소에 얼마나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이 등이 깨끗이 낫고 나면 또 나름의 불평과 게으름이 올라오겠지만 그래도 다음 번에는 조금이나마 덜 어리석어보려 한다.  


이번 삐끗함은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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