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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May 30. 2019

#199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왔던가

미련이 긴 녀석이다. 삐끗했던 등의 통증이 꽤 며칠 째 가고 있다. 물리치료를 하고 침을 50대쯤 맞고 나면 제법 괜찮은 듯 싶다가도, 자고 일어나 아침이 되면 다시 끙끙이다. 기껏 해놓은 과제물이 날아가 첫 페이지부터 새로 작업해야하는 느낌이랄까. 스무살 무렵에는 운동을 하다가 통증이 생겨도 길어야 사흘이면 깨끗이 사라지곤 했다. 일상에서는 잊고 살던 나이가 이렇게 아플 때면 저절로 생각난다.  


몸이 조금 불편하다보니 여러 가지가 말썽이다. 매일 새벽에 달리던 뒷산도 갈 수 없고, 주말에는 뛰어주겠노라 약속한 강아지 산책도 무기한 보류다. 헬스장도 며칠 째 결석 중. 하지만 모든 말썽 중에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글쓰는 작업이다. 맛사지 기구를 붙이느라 카페 대신 집에서 일하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전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5단으로 변속하지 못하는 자동차 기어가 된 것 같다. 뇌과학적으로는 당연한  현상이다. ‘아프다’는 인식이 글에 집중하는 작업 기억의 문을 불쑥불쑥 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삐그덕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써나가다 보니 새삼, 고생하는 와중에도 대작을 남겼던 훌륭한 사람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다산 정약용은 복숭아 뼈가 세 번이나 망가지면서도 20년간 500권을 작업했고, 천식이 심했던 칼 마르크스는 침대에 누워 콜록거리면서도 <자본론>을 썼다. 조정래 역시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등 통증과 싸웠는데 가난했던 에릭호퍼는 그 싸움의 대상이 아예 배고픔이었다. 다들 참 열심히도 사셨다. 떠올리고 보니 '통증이 꽤 며칠' 운운하는 내가 부끄럽다.  


역시 전업 작가인 동갑내기 친구에게 달리기를 하다가 다쳤다고 몸 조심하라 안부를 전했더니, 친구는 벌써 발목이 좋지 않다고 답을 해 왔다. 이제 ‘우리가 벌써 이런 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들어선 것일까. 난생 처음 아파본 등 덕택에 우리 몸 구석구석이 평소에 얼마나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이 등이 깨끗이 낫고 나면 또 나름의 불평과 게으름이 올라오겠지만 그래도 다음 번에는 조금이나마 덜 어리석어보려 한다.  


이번 삐끗함은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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