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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01. 2019

#201 퇴사를 하고 폭면이 사라졌다

폭면의 기원에 대한 가벼운 고찰

[폭면은 어디로 간 것일까] 


퇴사한 지 어느덧 4주가 지났다. 남은 연차 휴가를 정산한 마지막 급여도 들어왔고 머지않아 퇴직금도 받을테니 회사와의 인연은 이래저래 매듭이 지어지는 중이다. 지난 주말에 회사 사람 결혼식이 있어서 오랜만에 몇몇 분들을 만났다. 아직 그만둔지 오래지 않은 탓인지 인사를 나누는 것이 회사 안과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회사 안에 있어도 팀이 다르고 층이 달라 매일 볼 수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회사 밖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는 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는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매일 아침에 똑같이 출근하고…”라고 웃었다. 실제로 그랬다. 도쿄 여행을 잠깐 다녀온 것 외에는 푹 쉬었다, 실컷 놀아봤다, 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회사 다닐 때와 스케줄 자체는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났다. 의식하지 않았는데 바뀐 것이 하나 있었다. 4주 동안 나에게는 폭면이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사골 뼈를 고아내듯이 12시간쯤 푹 자는 것이 꽤 오래된 일상이었다. 대개는 주말이었다. ‘더 이상은 못 자겠다’ 싶이 자야 마음에 불만이 없었고 다시 한 주를 살아갈 힘이 났다. 때때로 해야할 일이 많으면 한 주를 건너뛰기도 했지만 그러면 다음 주에는 15시간쯤 말도 안되게 오래 자기도 했다. 폭면이 몸에 맞는지 그렇게 자도 허리 한 번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4주 동안 폭면이 없었다. ‘이제 폭면을 끊어야지’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랬다.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고, 눈을 뜬 다음에는 이불 위에서 밍기적거리지 않았다. 이불을 개자마자 옷을 입고 운동을 나간 일도 밍기적거림을 끊어내는 데 한 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폭면하고 싶은 생각조차 한 번도 들지 않았을까. 적게 잡아도 직장을 다니는 몇 년 동안은 꾸준히 해온 습관인데 말이다. 몇 가지를 곰곰이 꼽아보았다.  


움직임이 적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닌 듯 하다. 퇴사한 다음 날부터 카페나 도서관으로 똑같이 출근했고, 밤에는 집에서 야근을 했다. 오히려 주중, 주말 구분없이 일했으니 근무 시간은 더 길 것이다. 게다가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 운동을 해서 Fitbit이 알려주는 활동량은 더 많았다.  


덜 먹어서 그랬을까. 가능성이 있다. 퇴사한 다다음날 즈음이었을 것이다. 생활 패턴을 바꾸어본다고 아침을 든든히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머리가 멍했다. 회사를 다닐 때야 머리가 멍해도 사무실에 몸을 밀어넣었고, 그렇게 앉아서 전화라도 돌리면 업무는 진행되었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은가. "새벽 4시 기상. 간단하게 삶은 계란 두 알로 아침을 먹은 뒤 내리 세 시간을 쓴다. 50년 동안 100권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이다.”라던 마루야마 겐지가 떠올랐다. 화들짝 놀라서 식사량을 줄였다. 배부르지 않게 먹고는 곧장 출근해서 배고플 때까지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대개는 이른 저녁 시간이었고 자연스레 먹는 양이 적어졌다.  


스트레스가 줄어서 그랬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회사를 나온 뒤에는 스트레스랄 것이 크게 없었다.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읽고 싶은 만큼 읽다가, 배가 고프면 먹고 몸이 찌뿌뚱하면 운동을 갔다. 그렇게 먹고, 자고, 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내가 정한 일이었으므로 내가 나를 채찍질하는 회초리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쯤 부끄러웠다. 회사 일을 할 때도 내 일처럼 여기려 했는데 몸을 보니 아무래도 나는 거기까지는 닿지 못했던 거다. 


나에게 폭면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계속 이렇게 갈 수 있을까. 고작 한달 남짓이라 솔직히 확신은 없다. 몸과 마음이 지금과 같은데 어느덧 슬그머니 폭면이 돌아온다면 폭면을 해야할 이유가 어딘가 있겠지. 어쩌면 폭면은 나의 몸이 나에게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르겠다.  






[폭면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나저나 나의 폭면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폭면이 무엇인지부터 짚어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에 어떤 ‘잠’을 폭면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요건과 주관적인 요건이다. 


우선 객관적인 요건은 절대 시간이다. 딱히 ‘몇 시간 이상’이라고 못을 박아두기는 애매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는 시간보다는 확실히 길어야 한다. 7시간쯤 잤으면서 “나 어제 폭면해버렸어. 큰일이야.”라고 말하면, 초밥 한 접시 먹고 “나 못참고 과식해버렸어. 살찌면 어쩌지.”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자야할까. 9시간? 12시간? 정해진 답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10시간 정도는 자야 폭면이냐 아니냐를 논할 기본 자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가 지금껏 짜장 곱배기를 먹고 ‘과식했다’고 말한 적이 없듯, 나의 폭면이 10시간 정도에 그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의 길이 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폭면이라고 할 때는 무언가 특유의 느낌이 존재한다. 나는 감기 몸살에 걸려서 오래 누워있었다거나, 하루밤을 꼬박 샌 다음날 많이 잤다고 해서 함부로 ‘폭면’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폭면의 주관적인 요건, 일종의 마음가짐이다.  


잠들 때, 내일 아침을 기약하지 않아야 한다. 고정되어 있던 알람도 일부러 해제하고 암막커튼을 미리 쳐 두는 등 아침이 밝아도 웬만해선 깨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태도가 사전에 필요하다. 과실로 인한 폭면은 불가. 폭면에는 고의가 요구된다. “내일은 휴일이니 늦잠이나 실컷 자야겠다.”같은 혼잣말을 하고 있다면 고의의 요건을 적절하게 충족한다. 


또 한 가지는, 오늘 일을 싹뚝 끊어버리려는 마음이다. 고민거리가 많아 스트레스를 받건 하루를 엉망으로 보낸 자신이 부끄럽건 잠을 자는 동안 스위치를 끊고 깨끗이 잊기를 바라야 폭면이다. 그런 바람은 다음날 눈을 뜨면 컨디션 좋은 '새로운 나’가 되어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움직인다.  “다 잊고 술이나 마셔.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거야”라는 흔한 위로의 레파토리에서 술을 잠으로 바꾼 셈이다. 셀프 리프레쉬, 혹은 정신적인 빨래라고나 할까.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잠에 들어가면 고분고분한 몸은 알아서 수면 시간을 늘려준다. 신체 시계는 태엽이 풀어지듯 느릿느릿 가다가 다음날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눈을 뜨게 만든다. 가끔은 평일의 습관 탓인지, 노화의 징조인지 그런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일찍 잠이 깨는 경우가 있지만 폭면의 의도가 충실하다면 곧장 다시 잠에 빠질 수가 있다. 이어서 폭면의 절대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폭면의 완성. 


절대 시간과 폭면의 의도. 이 두 가지를 갖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을까. 10대 고등학생 시절은 확실히 아니다. 고3 때도 잠이 많은 나였지만, 그때는 공부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30대 직장생활 중에는 확실히 폭면이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불금의 폭음을 설레며 기다리듯, 잠을 좋아하는 나는 주말의 폭면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다면 아마도 폭면의 시작은 20대 대학생 무렵이 아닐까. 그 때의 나는 대학생이자 고시생이었다. 욕심 탓에 두 가지 생활을 한데 섞어버렸고, 어리석었던 까닭에 두 가지 모두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다. 존재론적으로 절반은 행복하고 절반은 그럴 수 없는 시기였건만 결과론적으로 전자는 후자에 희석되어 희미하게 사라졌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삶의 괴로움과 즐거움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해야할 공부는 많았으나 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고, 인내심이 부족하여 수시로 그 마음을 따랐으므로 자주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오늘까지의 나를 잊고 새로운 나로 리프레쉬되어있길 바랄 때 폭면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 리프레쉬가 며칠 못가 다시 ‘부끄러운 나’에 오염되었지만 말이다. 폭면의 출발점은 그곳 어디쯤일듯 하다. 


가지는 뿌리에서 나오고 열매는 씨앗에서 자란다. 속성을 알고자 하면 기원을 살피고 사람을 알고자 하면 살아온 바를 보라고 들었다. 언제 폭면이 시작되었는지를 살피니 왜 폭면이 시작되었는지 알겠다. 출발이 썩 아름답지 않으므로 과정 역시 자랑할 바는 못된다. 꽤 오랫동안 들러붙어 딱지처럼 많이 굳어졌다고 해도 딱지는 딱지일 뿐.  


딱지가 생기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었듯이 그 이유가 사라지면 딱지도 서서히 사라져갈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애를 써서 일부러 떼내지는 않으려 한다.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가 폭면이라면, 원인이 사라질 때 상처는 저절로 아물어 갈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딱지가 사라지고 흉터로만 남을 날도 오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폭면을 잊고 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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