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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03. 2019

#203 이 삶에서 제일 좋은 것을 건져야 한다

새하얀 셔츠를 입고 앉아계셨다. 머리 역시 새하얀 할아버지다. 뒷산의 좁다란 오솔길 가, 널찍한 바위 위였다. 할아버지는 손에 스프링 노트를 들고, 그 노트에 손으로 적어놓은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그 앞을 지날 때 “떠나가는 항구우으야~”라며 목청이 높아졌다. 무릎을 탁탁 치며 스스로 장단을 맞추는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퀸의 윔블던 스타디움처럼 환호와 박수가 가득한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의 이 산, 할아버지는 행복하실 것이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뒷산을 달리는 일이 제법 자리를 잡아간다. 3주를 꾸준히 하면 못을 나무에 톡톡 쳐서 살짝 고정시키듯, 최소한의 시작은 하는거라고 들었다. 이제는 힘을 주어 쾅쾅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 산을 뛰면 행복하다. 더할 나위가 없다. 저 할아버지도 그러실테고, 이 시간 여기서 마주치는 다른 모든 동네 분들도 그러실테지. 아마 재벌 회장님이라 해도 아침 산에서 느끼는 행복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가 지저귀고,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린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멋진 선물이 이제 막 도착했다.


왜 진작 이렇게 아침을 시작하지 못했을까. 아쉽기까지 하다. 새하얀 할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저 자리에 나오셨을 것이다. 흘끗보니 가사를 적은 노트가 조금 낡았다. 내가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퇴근 뒤에는 글에 매달려 있는 동안 할아버지는 매일 이 산을 찾아 윔블던의 환호를 즐기셨다. 그 분이 가진 하루에서 좋은 것을 찾아 누리신 것이다.


“이 삶에서 제일 좋은 것을 건져야 한다.”라고 르포르타주 사진작가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을 직접 찾아 생생하게 담은 사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다. 그런 그가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를 낳아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뒤에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 얻은 깨달음이다. 삶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힘든 일은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좋은 것도 있다. 할아버지에게 산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아침의 여유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일할 수 있는 직장과 몇 권의 책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할아버지가 될 수 없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누릴 만한 멋진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가질 수 없는 두 가지를 원할때 우리는 그것을 욕심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힘든 일만 있을 뿐 좋은 것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쎄. 생각은 자기의 몫이지만, 그 생각에 대한 결과도 자신의 몫이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파킨슨병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몸이 뻣뻣하게 굳거나 혹은 제어가 안될 정도로 덜덜 떨리는 병이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약을 계속 먹어야 하는데 약효가 떨어질 즈음이면 몸이 다시 말을 안 듣는다. 어떤 환자 분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종이컵을 들지 못해 힘겨워했다. 이제 겨우 쉰 살이 조금 넘었는데 발병한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고. 제작진은 파킨슨병이 20대, 30대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병이 생기는 이유도, 정확한 치료법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 뇌에서 분비되어야 하는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쾌감과 의욕을 주고, 운동신경을 제어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산을 이렇게 달리는 나는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고 있다. 새하얀 할아버지도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고 있다. 이 글을 끄적이는 동안 저쪽 아래 벤치에서 “밖에 있는 상추 뜯어오니라.”라고 전화하는 할머니도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아마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고 있을 것이다. 어제 방송에는 파킨슨병으로 인해 요양보호사의 도움이 없이는 침대에서 휠체어로 몸을 옮기는 것도 힘든 원로 가수 한 분이 나왔다.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히트곡을 부른 가수다. 그 분이 누워있는 방에는 한 때 전국 투어 콘서트를 했던 포스터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이 삶에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누려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감사할 수 있을 때 그것에 감사해야한다고도 말이다. 아니다. 정말 좋은 엄청난 것들은 아예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살아있으므로, 이미 내 삶에는 내가 모르는 좋은 것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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