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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05. 2019

#205 언제든 쉴 수는 있지만 이렇게 쉬어서는 안된다

같은 뒷산의 같은 벤치, 그리고 거의 같은 시간이다. 오늘은 많이 흐리다. 숲속 어디를 둘러봐도 햇살이 자리한 곳이 없다. 일기 예보를 보니 하루 종일 흐릴 예정. 그 말이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침부터 켜켜이 쌓인 구름은 퍽 두텁다. 


날씨가 흐린 까닭일까.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데 새 소리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알았다. 지저귀는 새가 적었고, 적은 새들마저 노랫소리가 작았다. 마치 아침 조회 시간에 마지못해 부르는 애국가 같다. 해가 뜨지 않아서려나. 어쩌면 새들은 햇살을 많이 좋아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해가 없어서 우울한 것일 수도. 하긴 우리집 푸들도 우리집 푸들도 어둑어둑 흐린 날엔 종일 소파 구석에 몸을 파묻고 잠만 잔다. 


저 새들을 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흐린 까닭이었어, 라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오늘은 평소보다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이불 위에서 곰처럼 웅크려 잔뜩 밍기적거린 후에야 눈을 떴다. 느릿느릿 이불을 개고,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느릿느릿 운동복을 걸쳐서 느릿느릿 밖으로 나왔다. 겨우 뒷산을 같은 코스로 돌고 나니 같은 이제 좀 정신이 든다. 맑아진 정신으로 밍기적의 범인을 색출하느니 용의자가 있었다. 지난 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나도 모르게 먹어버린 빵들이었다. 연유는 이랬다. 


어제는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 등록을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도 밥벌이가 되면 세법상으로는 사업이다. 애초에 사업가로 불릴 생각은 안 해보았으나 밥을 버는 사람은 세금을 내야 한다. 결국 나는 어엿한 사업가가 되어야 했다.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상호명을 적는 칸이 보였다. 나는 “재우의 서재”라고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사업자 등록증은 그 자리에서 바로 나왔다. 빳빳한 노란색 종이였다. 등록증과 함께 자그마한 세금 안내 책자를 받았다. 부가가치세, 종합소득세, 복식부기와 간편장부, 예정신고와 예정고지... 납품 단가를 낮추려 작정하고 찾아 온 거래처 사람의 말투처럼 딱딱하게 굳은 단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사업을 하려면 어느 것 하나 몰라서는 안된다는 필수 정보라고 했다.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어느 것 하나 못 들어본 말은 없었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이해되는 말도 없었다. 인터넷을 찾고 사전을 뒤졌다. 깊이 볼수록 어려웠다. 법이란 녀석이 원래 그랬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이 안된 나는 책상에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확 잠이나 자버리려 누웠다가 다시 불을 켰다. 나는 사업자였다. 저절로 해결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유튜브에서 기초 강의를 찾아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자정 즈음이었다. 그제야 아는 부분과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을 나눌 수 있었다. 내일 이어서 찾아볼 부분과 누군가에게 물어볼 부분을 정해놓고 나서야 주름진 미간이 풀어졌다. 물론 하다보면 나중에는 별 것 아닌 일이 되리라는 사실을 안다. 세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500만이 넘는 전국의 자영업자들 모두 그럭저럭 다들 하고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산꼭대기에 오른 이들이 많다고 해서 내 다리가 안 아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는 세무 대리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니까. 사업자란 원래 그런 거지. 


몇 시간을 끙끙대는 동안 머리는 조금 가벼워졌는데, 그 사이에 빵을 먹었다. 아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빵들이 제발로 입 속으로 뛰어들었다. 소보루 빵 한 개, 오징어 먹물 치즈 식빵 한 조각, 크림치즈빵 반 조각. 식탁 위에서 사흘 동안 살아남았던 친구들이 스트레스라는 적병의 갑작스런 야간 기습에 모조리 당한 것이다. 비닐 포장지와 소보루 부스러기 같은 전사자들의 유해만이 참혹했던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비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달 가까이 멀리했던 야식이었는데 와르르 무너졌다. 가벼워진 머리 대신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안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틈새를 비집고 “내일은 주말이니까…”하는 간사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떴다. 시계를 보았다. 여섯시 반이었다. 간사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그 목소리에 절반쯤 끌린 나는, 몸을 절반쯤 일으키다 말고 곰처럼 웅크렸다. 강아지가 달려와 손을 핥았다. 나는 이제 갓 자리를 잡아가는 아침 운동과 천국의 이부자리 속으로 손짓하는 빵의 영혼 사이에서 연옥에 갇힌 듯 밍기적거렸다. 그때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제임스 클리어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을 만드는 것은 지속성이다. 그런데 지속적인 노력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 경조사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 친구들과 놀 수도, 이유없이 하루쯤 제낄 수도 있다. 노력을 방해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기에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사전에 모두 차단하기도 불가능하다. 결국 한 번쯤, 아니 몇 번쯤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세상 모든 이들이 똑같다. 차이는 그 다음에 있다. 첫번째 화살에 이미 맞은 다음, 두번째 화살을 허락할 것이냐.  


습관의 정의가 무언가의 무의식적인 반복이라면 그것을 두번째 할 때부터 습관의 길에 들어선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 잘못은 인간적인 실수일지라도 두번째 잘못은 의식적인 과오다. 변명이라는 카드는 언제나 일회용이다. 그래, 일어나야지. 일을 해야지. 언제든 쉴 수는 있지만  이렇게 쉬어서는 안된다. 나는 사업자니까. 포상 휴가와 무단 결근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사업자의 자격이 없다.  


몸을 일으켰다. 두번째 화살은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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