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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08. 2019

#208 '괜히 열심히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친구를 만났다. 대학 동기들 중에 제일 자주 보는 친구다. 우리가 알게 된 지도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 간다. 시간이 참 빠르다. 20년의 시간이 잠깐 졸다가 깬 오후의 낮잠 같다. 이 친구가 새 직장에 들어간지 석달 째. 나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로펌 취업 면접을 볼 때 상사가 친구에게 했던 근무 조건이다. 


“2시 퇴근하셔야 되고요, 주말 중에 하루는 나오셔야 할 거예요.” 


여기서 2시는 새벽 2시다. 출근 시간은 9시 반 정도. 물론 친구는 근로자가 아니라 변호사다. 좋은 직장이고, 대우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연봉이 얼마쯤 되냐고 묻진 않았지만 로펌의 이름 값을 보면 지금껏 다녔던 다른 자리보다는 괜찮지 싶다. 아무튼 나는 그 상사의 말이 정말이었는지 궁금했다. 


“지난 주에는 일정이 좀 빡셌어. 서너시쯤 퇴근했지.” 


아이쿠 이런. 현실은 더하군. 친구는 자기가 ‘일을 못해서’ 오래 걸리는 거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도 나는 그럴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동기들 중에 제일 빨리 사법시험에 합격한 스마트하고 꼼꼼한 친구다. 나에게 혹시 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녀석이다. 앞으로 연차가 쌓여도 계속 그런 식으로 일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에 있는 한은 그렇다고 했다. 새벽 4시 반쯤 퇴근하던 날, 이제는 회사에 아무도 없겠지 하고 체크해봤더니 직속 상사가 아직 일을 하고 있더란다. 


잔을 부딪혔다. 맑은 술이 찰랑였다. 밥만 먹고 다시 일하러 들어가야 하지만 아쉬워서 애써 약한 청하를 시켰다. "진짜 건강 잘 챙겨야겠다 야." 하고 나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친구는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다면서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고 자정 쯤에 퇴근하는 날도 종종 있고, 식사 시간에 짬을 내서 가까운 헬스장도 간다고 했다. 유산소 10분, 근력 20분. 그렇게 일주일에 딱 두 번 정도 운동하면서 쉰다고. 


“여기 와보니 다들 일을 잘하더라.” 업무는 많겠지만 표정에는 별 불만이 없어보였다. 삶은 고기에 청하 한 병을 다 비우고 일어설 때까지  ‘일하기 싫다’는 식의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살고 있구나.” “그래. 열심히 살아야지. 너도 힘내자.”


그런 식의 말을 근래에 종종 듣는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열심히 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이런  메시지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글들도,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다.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다. 글쎄.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죽어라 일했는데 직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겪는다면, 공부에만 올인했는데 돌아온 결과가 불합격 뿐이라면, ‘억울하다, 괜히 애썼다.’는 생각이 불쑥 들 수도 있다. 나도 안다. 두 가지 모두 겪어본 일이다. 노오력을 해도 보상이 적은 마이너스 성장 시대니까 이런 일은 점점 더 흔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같은 사고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생관은 각자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마인드는 사실 장삿속이다. 준 만큼 돌려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속상하다는 뜻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네.’도 장삿속이다. 결국 받은 것이 없는데, 내 것을 줬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뜻이다. 눈이 밝은 사람이 하는 지혜의 한 마디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인생을 장사로 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식한테 잘 해줘봐야 아무 소용 없어.’라든지 ‘이렇게 결국 헤어질 것을 바보처럼 나만 잘해줬어.’같은 후회도 같은 레파토리다.


장삿속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본전 생각 자체는 자연스런 일일 수 있다. 문제는 과연 그 장삿속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냐다. 물론 열심히 일해서 보상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합격을 하면, 애인도 나에게 잘 해주면 더 기쁠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원하는 대로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뿐만 아니라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꼭 좋으리란 법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꼭 불행이란 법도 없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시험에서 안 되고, 회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것은 나의 일이고 결과를 짓는 것은 세상의 일 아닐까. 깨달음이란 신비한 것이 아니다. 법륜스님은 이 이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복음 26장39절)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이들의 자기 위로다. 지갑 속의 동전 몇 푼을 세며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가슴을 쓸어 내리는 거다. 상처받을 준비를 잔뜩 하고 움직인 다음에 다행히 다친 데가 없노라고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다. 그런 태도로 웅크리면 자존감이 높아지기 어렵다. 자존감이 무엇인가.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느낌이다. 자신이 가진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달라고 조르고, 두개를 주고는 하나 밖에 못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인가. 열심히 하는 사람만이 자존감이 높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당당하다. 그 자존감과 당당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가진 것이 없어도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행복이다. 


나는 자기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몇몇 친구들을 안다. 하고 있는 일이 그 자체로 좋아 정말로 열심히 하는 이들이다. 전문직 종사자도, 크지 않은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도, 작은 가게를 하는 사람도 있다. 직위나 수입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에게는 똑같은 향기가 난다. 그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전해진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향기. 


그들로부터 나는 단 한번도 ‘괜히 열심히 했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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