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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16. 2019

#211 퇴사를 하니 불안하진 않습니까?

젊은 시절의 시오노 나나미가 이탈리아에 머물며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어떤 출판사 편집자의 가이드를 맡게 되었다. 편집자가 "여기서 무얼하고 있느냐"라고 묻자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에 흥미가 있다고 답을 했다. 편집자는 지나가는 말로 르네상스의 ‘여자’들에 대해 써보는게 어떻겠냐고 던졌다. 그리고 6개월 뒤, 시오노 나나미는 정말로 원고를 써 왔다. 1968년, 그녀의 첫번째 책 <르네상스의 여인들>이었다.  


25년이 지나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권을 내놓았고, 이어서 15년 간 같은 책을 집필했다. 레일을 달리는 육중한 쇳덩어리 기관차처럼 매년 한 권씩 일정한 속도로 <로마인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집중, 그리고 지속. 15년의 시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글을 썼고, 글을 쓰러 갈 때는 자기 절제를 위해 정장을 입었다. 그렇게 50대 중반의 나이에 시작해 70살이 될 때 까지 여름 휴가는커녕 병원 한 번 가지 않았다. 혹시 병이라도 발견되면 일을 멈춰야 하는데, 일을 멈추면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녀에게 첫 책을 제안했던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작가와 사귀었지만, 시오노가 가장 성장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많이 컸다. 집중과 지속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다. 어찌 보면 꼭 수도하는 수녀 같다." 


사람은 성장하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라고 함은 그렇게 살 때 행복하다는 뜻이다. '요즘은 사는 재미가 없어’라는 생각이 불쑥 든다면, 인생이 성장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미(滋味)’라는 말은 원래 '자라나는(滋) 맛(味)’에서 나왔다. 일이, 공부가, 사업이 척척 자라는 사람 중에 눈빛이 흐릿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해야한다. 집중과 지속이다.  


확실히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 때 나는 눈높이 수학을 했었다. 사칙연산 문제를 하루 3장씩 푸는 학습지였다. 원칙대로라면 매일 정해진 양을, 시간을 재면서 풀어야 했다. 그렇게 하라고 만들어진 학습지다. 속도와 정답률 모두를 끌어 올리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철두철미한 아이가 아니었기에 대개는 사나흘씩 놀았다가 밀린 쓰레기 더미를 청소하듯 한 번에 해치웠다. 


예외가 딱 2주일간 있었다. 매일 저녁 아버지가 스탑워치로 시간을 쟀고, 나는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100m를 달리듯이 전력으로 풀었다. 집중도가 엄청나게 높았던 느낌이 지금도 기억난다. 열살 전후의 어린 나였지만 그 차이는 생생했다. 같은 훈련을 같은 시간에 집중한 결과였다. 어제보다 단축된 오늘의 기록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고, 내일은 더 빨리 풀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 꼭대기까지라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바로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6년 넘게, 300주를 훌쩍 넘게 학습지를 했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딱 2주일 뿐이라는 사실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때는 어렸기에 성장하는 느낌을 움켜쥐는 방법을 몰랐다. 시간이 지난 뒤에 기억 속에 남는 것은 힘들었다는 고통이 아니라 성장의 느낌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퇴사를 하고 나서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은 “그런데 불안하진 않습니까?”다. “좀 어떠세요?”라며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는 것도 결국 불안에 대한 궁금증이리라. 그 ‘불안’ 안에는 경제적으로 괜찮겠느냐, 혹은 소속감이 없는데 괜찮겠느냐,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안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대답이 물어보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라고 노래하면서 이것은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이자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라고 장담했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는 전혀 불안함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스트레스랄 것이 없다고 활짝 웃곤 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요, 뭐.”라는 말의 등 뒤에 숨겨 놓은 것이 나는 아무 것도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한다-계획은 거칠고 구상은 단순하다. 나는 비즈니스 모델을 철저히 세우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저처럼 살아보세요.’라고 본받음을 권유할 만한 스타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괜찮음이 의지하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성장하는 느낌. 


하루하루 쌓아가고 있구나, 내가 확실히 나아지고 있구나, 이만큼 채워왔구나. 그런 느낌은 먹지 않아도 나를 배부르게 만든다. 육중한 쇳덩어리 기관차를 산꼭대기 레일 위로 끌고 올라갈 수 있는 배부름이다. 성장하는 그 느낌만 꽉 쥐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든 될거라고, 뿐만아니라 잘 될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야할 일은 심플. 집중과 지속. 시오노 나나미는 아마도 이런 나를 응원할 것이다. 그녀는 '승부를 걸지 않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 했으니까.  


어제는 퇴직금이 들어왔다. 달력을 보니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은 퇴사 이후에도 빠르게 흐른다. 아직까지는 일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적어도 15년은 더 이렇게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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