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그동안 써온 원고와 모아 놓은 자료 등을 와세다대에 기증하겠다고 한 기사를 읽었다. ‘자료 등’이라고 간단히 써버렸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40년 간 쌓은 자료가 너무 많아 사무실이든 집이든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기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니 그 양이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수집해 놓은 레코드 판만 2만 장이라고. 와세다대에서는 일종의 하루키 라이브러리 같은 장소를 만들겠다고 화답했다. ‘그런 곳이 생긴다면 가보고 싶군’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중에 도쿄를 다시 한번 찾을 이유가 될 것 같다.
기사를 읽다가 궁금해졌다. ‘기증하는 물품들 가운데 <노르웨이의 숲> 원고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까지는 손으로 초고를 썼다. 컴퓨터를 사용한 것은 그 다음부터다. 워드프로세서가 작업하기 편리한 것은 당연하지만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육필 원고가 왠지 멋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쓱쓱 고쳐 쓴 글씨 위에는 어떤 ‘아우라(Aura)’라 있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아도 발터 벤야민이 쓴 ‘아우라’라는 말에는 유일성과 오리지널성이 의미있는 기준이었다. 아무래도 낡은 노트북 한 대와 외장 하드 한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전시관이라면 굉장히 쓸쓸할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맥으로 글을 쓰고 있긴 하다만. 기자회견 장의 기자들도 그 점이 궁금했나보다. 하루키는 친절하게도 “(<노르웨이의 숲>의 초고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기증하겠다.”고 답했다. 순간 나는 깜빡 잃어버린 지갑이 ‘그 자리에 있기를’ 하고 바라듯 초고가 남아있길 바랐다.
이렇게 화제가 된 초고는 사실 원고지가 아니라 대학 노트다. 스프링이 달린 두꺼운 대학 노트 말이다. 하루키는 유럽에 머무는 동안 <노르웨이의 숲>을 썼는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지라 사정상 젊잖게 원고지를 가지고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노트를 구해 틈이 날 때마다 펜으로 글을 이어 나갔다. 호텔 방에서도 썼고, 카페에서도 썼고, 공항 대기실이나 건물 로비에서도 썼다. 문자 그대로 어디서든지 글을 썼던 것이다. 그렇게 쓴 원고가 하루에 대략 7~8000자 정도. 나는 공허한 상실감과 묘한 분위기가 이국의 안개처럼 전개되는 <노르웨이의 숲>이 그런 비근한 일상 속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좋았다. 커피 자국 같은 별 볼일 없는 일상을 긁어내어 무언가 근사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니까.
나는 손바닥만한 탁자에 기대 글을 쓰는 서른 후반 하루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이미지를 마주하고 싶었다.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가 우리의 총체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다. 머릿속에 스윽 들어온 어떤 장면이 잊혀지지 않을 때 그러하다. 그런 장면은 기억 속에 단단히 고리를 박고는, 우리가 멀어지려고 할 때마다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그럼으로서 우리의 태도가 어느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제어한다. 법이나 규칙처럼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두지 않고서도 이미지는 제 역할을 조심스럽게 해낸다. 느슨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나는 서른 후반 즈음의 하루키가 나에게 그런 이미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훗날 하루키 라이브러리에 간다면 그런 사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오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 지금의 나로서는 갖고 있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작년 가을 동생을 보러 갔을 때다. 연휴에 연차 휴가를 붙여서 오슬로로 날아갔는데 공교롭게도 동생에게는 막 일감 하나가 발등에 불로 떨어졌다. 그 덕에 함께 있는 며칠 동안 방안의 공기가 조화롭기는 힘들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생각이 복잡했던 나는 가급적 노르웨이의 숲에서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싶었던 반면, 갑작스런 논문 마감이 코앞으로 닥친 동생은 <노르웨이의 숲>을 쓰듯이 일분 일초를 다투어야 했기 때문이다. 피오르드를 보고 산악 열차를 타기로 정해둔 일정 모두가 동생에게는 굉장한 부담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맥북을 챙겨서 여행을 했다. 노르웨이를 가로지르는 고속 기차는 하룻밤을 꼬박 달렸다. 동생은 그 기차에서 논문을 썼다. 밤샘 기차를 타고 동이 틀 즈음 베르겐에 닿았다. 동생은 박물관이 문을 열 때까지 부둣가 옆의 스타벅스에서 논문을 썼다. 베르겐에는 KODE 미술관이 유명했다.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사이 동생은 호텔방에서 논문을 썼다. 몇 차례쯤 산악 열차를 갈아탄 일도 있었다. 동생은 빵집에서 산 포카치아를 씹으며 비좁은 대합실에서 논문을 썼다. 베르겐에서 돌아오는 길은 피오르드를 구경하는 배편이었다. 노르웨이 여행에서 제일 손꼽히는 코스이기도 했다. 동생은 콘센트가 있는 좌석에 자리를 잡고 논문을 썼다. 작업을 하다가 멋진 스팟을 지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이따금 갑판 위로 나왔다. 배에서 내릴 즈음 동생의 자리 옆에는 선내 매점에서 산 커피가 도서관의 연구실처럼 수북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여행을 가 있는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동생은 작은 논문 한편을 꾸역꾸역 마감지었다.
그때는 몰랐다. 배에 앉아서, 기차에 앉아서, 대합실과 카페의 조그만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무 일 없던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런 뒤에야 조금씩 그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필름을 인화하기 위해서는 암실에서 일정 시간을 재워두어야 하는 것과 같았다. 틈이 나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쓰고 또 쓰는 모습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내 기억 속에 단단히 고리를 박았다.
법륜 스님에게서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은 자라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스스로 본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매일 아침 아이가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책을 읽든, 기도를 하든, 늘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반드시 아이의 마음 속에는 그 장면이 남아서 나중에 똑같이 그렇게 하는 아이가 된다고. 진정한 교육이란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아침에 연구실로 출근을 하면서 동생은 작업의 진척 사항을 이야기해준다. 작성하고 있는 논문도 있고, 복원 중인 1,000년 전의 경전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맥북을 두드리던 동생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가까운 곳에서 가까운 사람이 매일 무언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힘이 된다. 진정한 교육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응원 역시 실제로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이 아니라 말없이 이미지로 전해지는 응원. 여기 봐, 나도 이렇게 하고 있잖아,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