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Jun 24. 2019

#216 애쓰는 한 우리는 분명히 가고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수학 문제가 술술 풀리고, 페이지가 쓱쓱 넘어가야 공부가 잘 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노력 그 자체’가 아니라 점수나 진도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와주어야 칭찬을 받아온 데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학생들은 문제에 매달린 시간이 5분만 지나가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어려운 챕터를 공부해서 몇 시간 째 끙끙대도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얼굴은 거의 울상이 된다. ‘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다. 공부는 택시 운전이 아니라 여행에 가깝다. 교통 정체 없이 맨 마지막 페이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도중에 보이는 풍경들을 최대한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이 제대로 된 공부다. 진도가 척척 나가는 것은 그 내용이 학생의 수준에 비해 쉽기 때문이고, 끙끙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 동안 공부 했을 때 당연히 전자가 넘어간 페이지도, 풀어낸 문제도 많다. 

문제는 그래서 어느 쪽이 공부하는 이의 수준을 더 끌어올려줄까 하는 점이다. 주관적인 기분과는 별개로 그 답은 대개 후자다. 겉으로 볼 때는 샤프심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인상만 쓰고 있지만, 사실 두뇌는 차력사처럼 이를 악물고 맨몸으로 기차를 끄는 중이다.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공부 뿐만이 아니라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회사에서 일할 때 갑갑했던 순간들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무엇을 써야할지 몰라서 빈 모니터 화면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이를테면 ‘사업 계획서’ 같은 제목을 큼지막하게 써놓은 채 PPT 앞에서 일시정지한 채로 있는 경우다. 차라리 자료를 찾아 모으거나, 만들어놓은 보고서를 수정할 때는 재미라도 있다. 뭐라도 하는 것 같으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막내가 뭔가 바쁜 듯 보이는 편이 흐뭇할 것이다. 손익 계산의 예상치가 빽빽하게 적힌 엑셀 파일을 이리저리 고치고 있을 때면 지나가던 임원들은 늘 나를 격려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멍하니 있는 그 시간이다. 사업 계획서의 글씨체나 숫자를 바꾸는 작업보다 빈 모니터를 노려보는 일이 훨씬 가치있다. 그 일이 기획의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획(企劃)이란 꾀해서(企) 그린다는(劃) 뜻이다. 백지 위에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 자체가 기획이다. 그리고 당연히 손으로 그리기 전에 머릿속에서 그리는 일이 먼저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업이지만 말이다. 

이런 작업의 중요성을 명쾌하게 설명한 책은 황농문 교수의 <몰입>이다. 그는 편안한 안락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멍하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누워서 쉬는 것처럼 보여도, 황농문 교수의 두뇌는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몰입>에는 이렇게 ‘머릿속 열일’의 노하우를 잘 활용한 탁월한 사람들의 예가 여럿 나온다. 어떤 사람은 손에 쇠구슬을 든 채 안락의자에 누워서 생각으로만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살짝 졸음에 빠지면 손에서 놓친 쇠구슬이 양철통에 시끄럽게 떨어지면서 깨게 되어 있는데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의도적으로 두뇌를 집중의 상태로 몰아갔다. 

겉보기에 쓸모 없는 일을 함으로서 사실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하는 일. 하지 않음의 함. 무위(無爲)의 위(爲), 무용(無用)의 용(用)이랄까. <장자>에는 이런 멋진 이야기가 나온다. 

“목수 장석이 제나라에 가는데 곡원에 이르러서 사당에 심어진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그늘로 덮을 수 있고, 둘레를 헤아려 보니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높이는 열 길이나 언덕 위에 솟은 뒤에 가지가 뻗었고, 배를 만든다면 거의 십여 척에 달할 정도였다. 나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시장 같은데 장석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던 길을 가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석의 제자가 실컷 그 나무를 구경하고 장석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제가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토록 아름다운 재목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보려고 하지도 않으시며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시니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장석이 대답하기를, “그만두어라. 그 나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그것은 쓸모없는 나무다. 쓸 만한 데가 없으므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다.'라고 했다.

장석이 집으로 돌아오니 사당의 상수리나무가 꿈속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에다가 나를 비교하려는 것인가? 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등은 나무 열매와 풀 열매 따위의 과실이 익으면 그것을 잡아 뜯기고, 잡아 뜯기면 욕을 당하게 되어서,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기니, 이는 그 잘난 능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짓이다. 나는 쓸 데가 없어지기를 추구해온 지 오래라. 거의 죽을 뻔했다가 비로소 지금 그것을 얻었으니, 그것이야말로 나의 위대한 쓸모라고 할 것이다. 가령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크게 자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매일 이런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 써야 할 글감을 준비하기 위해 쓸모없는 일들을 한다. 아침에 뒷산을 뛰고, 부러 재래 시장 골목을 지나쳐 카페로 출근하고, 크레마가 사라질 때까지 아메리카노의 향을 맡거나, 창 밖의 활엽수가 흔들리는 것을 응시한다. 무엇이든 도움이 되나, 바로 오늘은 어느 것에서 도움을 얻을지 알 수 없다. ‘바로 이거다’ 하는 햇살은 어느 구름 뒤에 있었는지 탐색이 불가능하므로 나는 햇살이 비칠 때까지 끙끙거릴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다. 끙끙거림 자체가 노력이라는 것. 머리를 굴리는 그 작업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 그래서 글자 하나 쓰지 못했어도 이미 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이해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인상을 찡그릴 이유도 없다. 일이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니까. 

줄다리기를 할 때는 ‘영차 영차’하면서 당기는 요령이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그저 꽉 붙잡고 버티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끙끙거리면서 버티는 힘 없이는 아무 데도 닿을 수 없다. 앞으로 척척 나아가지 않더라도, 애쓰는 한 우리는 분명히 가고 있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말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