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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n 28. 2019

#219 연애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면

제법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힘들다고 했다. 몇 년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그때도 이야기를 조금 들어준 적이 있었기에 내 생각이 났나보다.  

상대는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사람이었다. 자기 커리어도 확실했고, 운동도 잘하고 열심히 일하는 목적 지향적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 잘해줄 때는 무척 잘해주면서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화를 버럭 냈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해야할까. 관계를 유지하려면 끝내는 매번 맞춰주고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숨을 편히 못 쉬고 살아온 것 같다고. 그렇게 좋았다가, 힘들었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 헤어지기로 했다. 헤어지던 순간은 마음이 후련했는데, 하루 이틀 지나고 나니 또 좋았던 순간들이 생각나 눈물이 솟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요?”하고 그 친구는 물었다.  

물론이지,하고 나는 답했다. 시간은 개울물과 같다. 슬픔이 잔뜩 묻은 흰 천을 가져다가 흐르는 개울물에 담가두면 조금씩 씻겨나가 하얗게 되기 마련이다. 기억을 부러 곱씹지 않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된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식당에서 묻은 조그만 얼룩이 아니니까. 그 때까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로 몸에 힘을 빼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시간에 몸을 맡기는 요령 비슷한 것이 있다면 아마 그런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물에 둥둥 떠서 제 자리에 머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헤어지기 전에는 나쁜 점이 보이지만, 헤어진 뒤에는 좋은 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물건이 원래 그렇다. 끊임없이 더 나은 자리를 찾는다. 지금 있는 여기가 아닌 저쪽 어딘가에 그 자리가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헤어질까 말까를 이랬다 저랬다 고민한 사람은, 헤어진 다음에는 다시 연락할까 말까를 이랬다 저랬다 고민한다. 그런 과정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여 방황하는 것. 그것을 일러 붓다는 윤회라고 불렀다.  

우리는 윤회라고 하면 흔히 전생과 다음 생을 생각한다. 지난 생에 원수여서 이번 생에 복수하느라 내 속을 썩인다고, 이번 생에는 답답하게 살았으니 다음 생에는 새로 태어나 자유롭게 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진짜 윤회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식의 윤회가 있을지 없을지 나는 모른다. 혹시 있다고 해도 새는 새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테니,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이야기들은 한켠으로 제쳐두자. 두 눈에 보이는 것,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윤회란 이런 것이 아닐까. '혼자 있을 때는 외롭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 막상 만나보니 나와 다른 점이 많다. 환상이 깨진다. 귀찮아지기 시작하고 다툼이 잦아진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낫겠지 싶다. 고민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함께 하는 기쁨보다 혼자일 때의 홀가분함과 더 나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의 합이 더 커지면 이별이 찾아온다.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런데 혼자 있으니 또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래서 누군가를…’  

윤회(輪廻)란 원래 수레 바퀴가(輪) 돈다(廻)는 뜻이다. 만나면 귀찮고, 혼자일 땐 외롭다. 그래서 만남으로 돌아가면 12시 정각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처럼 또 다시 한 바퀴의 시작이다. 붓다는 윤회가 곧 고(苦)라고 했다. 만날 때도 괴롭고 혼자일 때도 괴로운데, 만날 때는 혼자를 그리워하고 혼자일 때는 만날 짝을 찾으니 윤회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 수레바퀴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듯이 그 자체가 고통이다.  

윤회에서 벗어날 방법이 과연 있을까. 다행히 붓다는 진단과 함께 솔루션도 남겼다. 유명 록 그룹의 이름 '너바나(Nirvana)', 붓다가 이야기한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nirvana)', 보다 익숙한 우리 말로는 '열반(涅槃)'이다. 열반이란 사실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고 싶어’라며 괴로워하다가 막상 생 목숨을 끊으려 하니 ‘도저히 못하겠어’라고 덜덜 떤다면 어느 쪽이건 극한의 고통이다. 또 열반이란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천국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저쪽에만 가면 다 좋아질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저쪽이 정말 좋은지 어떤지 가기 전까지는 어차피 모른다. 

애초에 니르바나는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만나도 괴롭고 헤어져도 괴롭다면, 만나든 헤어지든 지금 이 자리에서 괴로움이 꺼진 상태가  되어야 한다. ‘저쪽 어딘가’를 바라는 ‘불이 켜진’ 상태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저쪽’에 닿으면, 우리는 그곳에서 또 다른 ‘저쪽 어딘가’를 바라게 될테니까. 완벽하게 좋기만 한 인연은 없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삶도 없다. 삶이 내 마음대로 다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어른이다. 그런 까닭에 그 어디도 완벽한 곳이 없다면, 그 어디에 있건 거기서 행복해야 한다. 만날 때는 만나주니 고맙고, 헤어지면 자유로와서 홀가분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면, 만나든 헤어지든 늘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먼저 행복해야, 그 행복을 함께 하는 이에게 나눠줄 수도 있다. 연애로 배우는 열반이다.

윤회와 열반이 어디 연애에만 있을까. 연애가 귀한 이유는 연애를 통해서 삶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날 때 만나서 좋고 혼자일 때 혼자여서 좋은 법을 터득한 사람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언제나 좋을 수 있다. 직장을 다녀도 좋고 퇴사를 해도 좋다. 학생이면 학생이라서 좋고, 돈을 벌면 돈을 벌어서 좋다. 비가 와도 해가 떠도, 집에 있어도 여행을 가도, 친구가 많아도 친구가 없어도 좋다. 그러니 인연이 닿아 이왕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온 바에야, 여기서 좋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의 기술이란 그런거다.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여기 있는 동안은 여기의 좋은 점을 최대한 누리는 것. 

몇 년 전, 카톨릭 신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보았다. 거기서 한 늙은 외국인 수사(修士)는 고뇌하는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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