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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3. 2015

#25 최고의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싶다면

그들은 이야기를 만든다

신입 사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 강의 시간의 일부를 뚝 떼어 받았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배정된 분량이 한 시간 반으로 짧다고는 볼 수 없는 길이였고, 둘째, 강의 주제가 설렁설렁 농담 섞기에 좋은 '우리 부서 소개' 같은 것이 아니라, 부담스럽게도 '회사의 경영 철학'이었으며, 셋째, 이런 강의는 원래 10년 차는 어금지금한 팀장급이 담당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람들 앞에서 주절주절 수다를 이어가는 일을 그다지 고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나로서는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 자체가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관심 있는 내용이라면 두 시간이 대수고, 세 시간이 길다하랴. 문제는 나에게 맡겨진 주제 그 자체, '회사의 경영 철학' 에 있다. 월급명세서 수령 경력 불과 3년 차에 (무려) 경영 철학을 (그것도) 신입 사원에게 (한술 더 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이 가볍게 느껴질 리 없다. 


그렇다고 빠져나갈 방법이 있나. 선임 두 분의 불가능한 일정 탓에 어쩌다 보니 낙수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 것을. 


이사님은 '경영 철학 및 미래전략실 OJT'라는 이름이 붙은 파일을 쪽지로 보냈다. 작년과 재작년에 했던 강의 자료니 약간만 수정해서 진행하면 무리가 없을 거라는 다독임도 함께였다. 회사 현황, 주요 연혁, 계열사 소개, 가치관, 중장기 전략이 차례차례 이어지는 예쁜 장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는 한숨이 나왔다. 먹구름은 강의를 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지 않았다. 자료가 다 있으니 강의야 어떻게든 꾸역꾸역 할 수 있다. 다만 강의를 '재미있게' 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것이 한숨이 나온 이유였다. 


굵은 대바늘로 이불을 꿰매듯, 여기저기 큰 구멍만 고쳐서 강의를 준비했다. 1년 전 자료이니 현황이나 사진 자료에 약간의 수정은 필요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격으로 넣을만한 말들을 생각하여 납땜하듯 덧붙였다. 그럭저럭 한 시간 반 동안 떠들 수 있는 분량은 된 것 같았다. 

강의를 며칠 앞두고 시강이 있었다. 사실상의 리허설이었다. 기획팀 팀장님이 강의 준비 상황을 미리 점검하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손을 보겠다, 는 것이 시강의 이유였다. 특강(이라고 쓰고 수다라고 읽어야 정확한데)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강의의 질이 달라지곤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렇다. 


아랫 사람이라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임하기 때문에 몸짓도 훨씬 자연스럽고 애드리브도 참기름을 바른 듯 술술 나온다. 반면 윗사람은, 그것도 강의를 평가하는 윗사람 앞에서 입을 열자면 녹이 잔뜩 슨 자전거처럼  온몸이 뻑뻑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윗사람-아랫사람은 꼭 지위상의 고하가 아니라 정보에 대한 장악력을 의미한다.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 앞에서는 '혹시 내가 틀릴까' 싶은 두려움 때문에 역시 몸이 굳는다. 머릿속의 난쟁이가 자가 검열하는 모니터링 프로그램 스위치를 ON으로 켜는 바람에 다른 시스템의 운영이 버벅거리는 느낌이다. 


시강을 본 기획팀장님의 멘토링 요지는 이랬다. 


첫째, 지루하지 않겠냐.
둘째, 강의를 들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겠냐. 

그랬다. 


약간의 애드리브와 농담이 양념처럼 들어갔다 해도 기본적인 구성은 2년 전부터 써오던 파일의 순서 그대로였다. 내가 만들지 않은 자료로 발표만 한다는 말은 즉, 다른 사람의 생각 위에 내 생각을 덧댄다는 뜻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기 취향 껏 담아온 뷔페 접시를 받아서 먹어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지루하다는 말은, 기억에 남을 것 같지 않다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PPT 위에서 잠자고 있는 문장을 여기저기 쿡쿡 찔러 줄줄 읽을 뿐인 강의가 지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 고민을 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강의였다. 우리 회사의 경영 철학을 이야기할 만큼 내가 구력이 쌓인 것도 아니었고, 신입사원이라고 해야 최근 1년 내 입사한 정규직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지라 대여섯 명 남짓이었다. 나 역시 몇 년 전 신입사원 강의를 들었지만 지금 무엇이 남아 있는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의 매출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마치 오토바이의 엔진 설계도를 보는 것처럼 어지러웠다는 기억만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한 가지다. '거로 VOCA' 시리즈로 유명한 김정기 변호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처음 영어학원에서 반을 하나 맡았을 때, 첫 날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은 두 명이었다. 그는 그 두 명을 마치 오페라 하우스의 만석 관객을 대하듯 강의를 했고 입소문을 타고 한 명씩 두 명씩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앞에 몇 명이 앉아있느냐는 근본적인 변수가 아니다. 몇 명의 사람이 자리를 채우건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강의의 최대치는 같다. 두 명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강의면 200명도  감동시킬 수 있고, 한 명을 졸게 만드는 강의라면  일천 명이 앉아있어도 하품만 뻐끔뻐끔 파도 타기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명의 신입 사원에게 강의할 지라도 500명의 대기업 신입 공채 사원이 빡빡하게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김연수의 표현대로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있어 글쓰기와 말하기라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강의를 사흘 남기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내용을 다시 짰다.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는 말은 아니다. 필요한 장표는, 해체한 집에서 쓸만한 서까래를 그대로 두듯 고스란히 모셔놓았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가 상영되듯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도록 강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자문했다. 


무슨 이야기를 기억에 남기고 싶은가.


<스틱>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PT 경연대회를 열고 관중석의 사람들에게 채점을 하게 했다. 사람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PT를 결정했고, 우승의 영광은 유창한 말솜씨와 뛰어난 대중 친화력을 자랑했던 어느 팀에게 돌아갔다. <스틱>의 저자들이 주목한 것은 그 다음의 이야기다. 채점과 수상이 끝난 다음에 관중석에 물었다. 


"우승한 팀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사람들은 당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PT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이 최고점을 준 PT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어제, 신입사원 강의를 무사히 마쳤다. 준비한 내용을 빠짐없이 전달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듯 원 없이 풀어놓았다.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을 했으니 며칠 뒤에 받아서 보면 스스로 개선할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중석의 청중들은 나의 PT에 몇 점을 주었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내 이야기는 그들의 기억에 Stick 되었을까. 며칠 뒤에 점심 식사라도 함께하면서 슬쩍 물어보아야겠다. 신입 강의의 성패 여부는  그때 알 수 있겠지. 

강의 구력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조금도 못되지만, 멋진 강의와 PT에 애정이 있는 내가 보기에 최고의 프리젠터는 스티브 잡스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스타일을 꼽자면 말콤 그래드웰이다. 그 둘을 적당히 섞은 어딘가에 내가 닿고자 하는 모습이 있을 테다. 그 두 사람이 하는 PT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 


"월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WWE)의 CEO는 빈스 맥마흔이다. 맥마흔은 프로레슬링을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새롭게 포장함으로써 프로 레슬링이 가짜임을 부인하는 오랜 전통인 '케이페이브(Keyfabe)'를 박살 냈다. 레슬링 다큐멘터리 <매트 밖에서>에서 맥마흔에게 WWE가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맥마흔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영화(이야기)를 만들지요.'"

- 저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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