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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08. 2015

#56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을 살고 있는가

바카디처럼 진한 마루야마 겐지의 독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카페의 모퉁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가게 문을 막 연 참인지, 1883 캐러멜 시럽 색깔로 머리를 염색한 아르바이트생이 탁자 기둥의 먼지를 닦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곳까지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흐뭇하다. 괜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늦잠을 뒹굴거리지 않고 루꼴라 잉글리시 머핀과 아메리카노가 모닝세트로 제공되는 시간에 카페에 온 것은 마루야마 겐지의 얇은 산문집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때문이다. 써놓고 보니 잔잔하게 흐르는 카페 음악을 배경으로 연갈색의 향긋한 크레마를 음미하며 읽기에 그다지 어울리는 제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뭐 어쩔 수 없지. 인생에 대한 확신에 불타는 수험생들 옆이나, "이번 주도  잘해봅시다"라고 파이팅을 독려하는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읽기도 좀 거친 제목인 것은 마찬가지다. 


마루야마 겐지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가 많은 작가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이거다' 하고 말하면, "아아 그 책  말이군요"라고 끄덕일만한 초베스트셀러도 없다. 사실 나도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모른다. 4월 중순에 신림역 알라딘 중고서점의 재고를 검색했을 때 고작 <천년 동안에 2> 한 권이 있었는데, 20일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천년 동안에 1>은 없고 말이다. 



어쩌면 소설보다 유명한 것은 그의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산 고등학교를 졸업, 모스부호를 두드리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회사가 매각되어 뒤숭숭한 때 무료한 시기를 견딜 수 없어 회사 종이에 회사 펜으로 소설을 써서, 회사 봉투에 넣어 문학상에 응모한다. 그렇게 쓴 첫 작품이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을 받았다. 23살의 역대 최연소 수상. 


"소설로 인정을 받았으니 소설로 승부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말을 하고, 일본의 북알프스 산기슭의 외딴 곳으로 이사. 철저하게 원고지 인세에만 기대 살겠다고 결심하고, 평생 "몇 달간 작업할 수 있는 잔고가 남아있지?"를 확인하는 재정적인 시한부 인생을 이어간다. 


그는 일체의 문학상과 청탁 원고를 거절하며 완전하게 '쓰고 싶은 글만 쓰면서' 살았다. 지금은 '일본의 문학정신'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겐지지만, 여전히 문단과 일체의 교류를 끊은 채 글을 쓰고, 산 속을 뛰어다니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를 우연하게 읽다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는 '멋진 제목'의 책이 나온 것을 알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손꼽던 참이었다. 200페이지 남짓, 얇은 책이다. 줄 간격도 듬성듬성하고, 문장마다 문단을 바꾸어 쓴 부분이 많아 텍스트의 양 자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엿을 우물거리는 달콤한 심정으로 즐겁게 읽으려 마음 먹었는데, 막상 글을 펴고 보니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은 이불을 욕조에 담근 듯 무거워져서, 군데군데 멍하니 글을 멈추곤 했다. 퇴계 이황 선생의 말처럼 '마치 바늘과 같아 내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듯' 했다. 



"왜 그렇게 안정적이고 먹고살 걱정이 없는 느긋한 인생에 매료되는가. 자기 안에 다양한 능력과 가능성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매가리 없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인가. 정말 이 세상을 살고 싶기나 한 것인가. 사실을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애당초 일이냐 취미냐 하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생활의 기반인 일 자체가 재미있고 거기에서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살고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
"하루 세 끼를 먹고 그럭저럭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루하루가 밋밋하고 살아 있음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일도 없고, 새 아침을 맞아 본들 마음에서 우울함이 떠나지 않는 원인을 찾아본 적이 있는가. 인생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태어나 보니 지옥 아닌가"
"알아서 기니 그 따위로 살다 죽는 것이다. "



예전에 '바카디'를 마신 적이 있었다. 한 때 동대문 주류상가를 찾아 '깔루아'니 '말리부'니 하는 리큐르들을 사 모은 적이 있었다. 우유에 홀짝홀짝 타 마시면 향도 좋고, 알딸딸한 느낌도 어른스러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누가 말하기를 '바카디'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면 완전 꿀맛이라 했다. '리큐르 중에서는 그게 최고'라고 엄지를 위아래로 흔들며 강력히 추천했었다.


노란 알코올이 출렁거리는 '바카디 151'을 사서 보물처럼 안고 왔다. 작은 유리 잔을 꺼내 탄산이 보그르르 올라오는 사이다를 조금 섞었다. 러시아 사람들처럼 가루약을 먹듯 한 모금에 '탁' 털어 넣었다. 나는 순간, 성대에 불이 붙는 줄 알았다. 아주 잠깐 오픈된 지옥문을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바카디 151'의 도수가, 151을 반으로 나눈 75.5% 임은  그때 알았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의 책 표지에 적힌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독한 인생론'이란 빨간 띠지를 보고 바카디 생각이 났다. 세상 모르고 잠을 쿨쿨 자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 달궈진 바비큐 그릴 위에 누워있음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오픈된 지옥문. 



마루야마 겐지의 거친 글이 와 닿았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글쓴이 자신이 실제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는 자세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둘째, 일흔이 넘은 지금도 같은 자세로 살고 있다. 


우리가 지옥불에 노릇노릇 구워지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인생에게 엿을'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알프스의 꼬장꼬장한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기의 인생을 사는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인간이라면 생각하고 생각해 재능을 찾아야 한다. 생애를 다 바쳐도 좋을 만큼의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인 환영 따위가 절대 아니다. 차분히 기다리고 말없이 시시각각 관찰하는 끈질김만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고 언젠가 만날 수 있는 현실 자체이다. "


<소설가의 각오>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나는 소설가니까 소설로 승부를 보고 싶다."


조만간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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