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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0. 2015

#57 바나나와 스파게티 소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지니

회사의 한 어르신이 껍질을 반쯤 벗긴 바나나를 내밀었다. 


"한대리 절반 먹을려? 다 먹기는 양이 많아서."
오전 시간. 아침을 먹고 출근한터라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나나를 보니 문득, 어제 들은 뉴스가 생각났다. 
"예, 떼어주세요."


허리를 뚝 자른 바나나를 받아 들며 말했다. 
"고문님, 이제 바나나 비싸질 겁니다. 아예 못 먹을 수도 있고요." 

스파게티 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말콤 그래드웰이 TED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이제부터 이어질 활자가 지루한 분들은 유튜브에서 '스파게티 소스'와 '말콤 그래드웰'을 검색해서 동영상을 보시길 권한다. 폭탄 맞은 이상한 파마 머리를 하고도 스마트함이 넘치는 사람이 거기 있다. 


하워드 모스코위츠는 정신 물리학자였다. 정신 물리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강연을 하는 말콤 자신도 잘 모른다니까 상관은 없다. 게다가 말콤은 정신 물리학자와 2년 간 데이트한 적도 있다고 하니, 관심을 가진다 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가 보다. 아무튼 하워드가 정신 물리학의 도구를 이용하여 주로 한 것은 '무엇인가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로 식품업계와 일을 같이 했다. 


한 번은 펩시가 그에게 찾아왔다. 


콜라의 당도를 조절하기 위해 아스파탐이라는 재료를 넣는데, 아스파탐을 얼마나 넣어야 되는지, 가장 알맞은 당도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펩시는 8%에서 12% 사이의 범위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워드가 "많은 사람들에게 시음을 하게 하고, 제일 많은 이들이 원하는 양으로 하면 될 것  아니요?"라고 묻자 펩시는 난색을 표했다. 문제는 선호도 곡선이 종형(bell)을 이루지 않는데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통계의 기억을 끄집어 보면, 수치가 정규분포를 따를 경우 가운데가 볼록한 모양이 된다. 보통의 입맛을 가진 사람이 다수를 이룬다는 말이다. 하지만 콜라의 선호도는 달랐다. 선호도의 그래프는  8%에서 12%까지 수평선처럼 평평했다. 사람들은 8%에서 12%까지, '다양한' 당도의 콜라를 '골고루'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탐구를 거듭하던 중 하워드 모스코위츠는 번쩍이는 깨달음을 얻는다. 


'질문이 잘못된 거다.
세상에는 '완벽한 펩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펩시들'이 존재한다.' 

그는 이 깨달음을 식품업계에 전파하기 위해 구두가 닳도록 돌아다녔다. '최고의 피클 맛'을 찾아달라는 피클 회사의 요청에 그는 '완벽한 피클들'을 찾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런 시도의 결과로 '블래식 피클'사는 '톡 쏘는 맛 피클'을 출시하기도 했다. 먹어본 적이 없어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복음을 전파 중인 하워드에게 통조림 수프로 유명한 캠벨이 찾아 왔다. 스파게티 소스였다. 


켐벨은 '프레고'라는 브랜드의 스파게티 소스를 출시한 상태였다. 당시 스파게티 소스의 시장 점유 1위 업체는 '라구'였다. 프레고는 품질 면에서 라구보다 월등히 앞섰다. 프레고는 자사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공개 테스트도 진행했다. 스파게티 면이 담긴 접시를 두개 놓고, 그 위에 각각 프레고와 라구의 소스를 부었다. 프레고의 소스는 스파게티 면 위에 상당량 남아있었던 반면, 라구의 소스는 주루룩 흘러내려 접시 바닥에 물처럼 고였다. 프레고가 보다 나은 제품이라는 증거였다. 우수한 제품을 바탕으로 프레고는 자신 있게 소스 시장에서 싸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고는 계속 라구에게 맥없이 밀리고 있었다. 


캠벨의 SOS를 받은 하워드는 그의 특기를 살려 일에 착수했다. 바로 측정하는 작업이다. 하워드는 캠벨의 요리사를 동원하여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스파게티 소스를 만들도록 했다. 순한 소스, 매운 소스, 강한 양념 소스, 마늘 소스, 양파 소스, 건더기가 많은 소스... 요리사들은 무려 45가지의 소스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든 45가지 소스를 들고 하워드는 돌아다녔다. 강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두 시간 정도 실컷 스파게티를 맛보게 한 다음에 소스의 선호도를 표시하게 했다. 미국 전역 구석구석에 2년 동안 소스를 나르는 사이 하워드는 엄청난 양의 '미국인의 스파게티 소스 선호도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이랬다.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스파게티 소스는 크게 세 가지 그룹으로 묶을 수 있었다. 순한 소스, 강한 양념 소스, 덩어리 진 소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왜냐면 그동안 스파게티 소스 업계에는 '덩어리 진 chunky' 소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1/3이 좋아하는 소스가, 심지어 출시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스파게티 소스 업계도 계속 시장조사를 해 왔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고, 선호도가 높은 소스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한 번도 "덩어리 진 소스가 좋다."는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인의 1/3은 가슴 깊이 덩어리 진 소스를 좋아하면서도,
맛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물으면, 대다수는 '깊고 진하고 풍부한 맛'이라 답한다. 그러나 실제로 '깊고 진하고 풍부한 맛'을 주문하는 사람은 25% 내외에 불과하다. 가장 많이 찾는 커피는 '우유를 넣은 연한 커피'다. 하워드는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들의 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워드가 프레고의 소스 라인업을 만들기 전까지, 스파게티 소스 업계의 생각은 고정된 틀에 갇혀 있었다. 세상에는 하나의 스파게티 요리에 대해 하나의 '이상적인' 스파게티 소스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모든 이들이 '보다 완벽에 가까운' 스파게티 소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것이 스파게티 소스의 역사였다. 하지만 하워드가 그들의 손에 포크를 쥐어주고 45가지 스파게티를 맛보게 하자, '이상적인' 스파게티 소스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한' 생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 소스를 고를 때 비로소 만족했는데, 사람의 입맛은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프레고는 새로운 스파게티 소스 라인업에 힘입어 곧 소스 업계를 평정했다. '덩어리 진' 스파게티 소스는 출시 후 10년 동안 6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나 역시 '덩어리 진' 소스를 좋아한다. 식품업계는 하워드의 복음에 응답했다. 그 결과 7종의 식초와 14종의 머스터드 소스와 71종의 올리브유가 놓인 마트의 진열대가 존재하게 되었다. 


말콤은 이런 이야기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최고의 커피를 하나 골라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100점 만점으로 평점을 매기라고 하면 대략 60점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사람들이 취향따라 마실 수 있도록 세 가지 종류의 커피를 놓아두면 78점 정도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 60점과 78점은 '그저 그런 것'과 '훌륭한 것'의 차이다. 하워드는 스파게티 소스를 통해 이 세상에 행복을 더 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선물해주었다. 


바로 다양성의 인정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갑자기 바나나가 멸종 위기라 한다. 곰팡이의 일종인 파나마 병이 확산되는데 백신도 치료제도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는 원래 1000여 종의 바나나가 있는데, 생산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캐번디쉬 한 종류다. 전 세계의 바나나 농장들은 크고 맛있으며 경작하기 쉬운 품종만 남기고 다른 품종은 헌신짝처럼 내다 버렸다. 


단일 품종을 경작하게 되면 그 품종에 강한 병충해가 돌았을 때 한 순간에 모두 사라질 위험이 있다. 공정무역 책 어딘가에서 읽은 이야기다. 말로만 들었던, 이론적으로만 존재했던 경고가 지금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나는 중이다. 머지않아 우리가 동네 과일가게에서 사먹게 될 캐번디쉬 바나나가 금값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어쩌면 '싱아'를 먹어본 적 없는 우리 중 누군가는 <그 많던 바나나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책을 쓰게 되겠지. 언젠가 아이들은 그 책을 집으며 우리 세대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아빠, 바나나가 뭐야?" 


곧 맛보기 어려워질 바나나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반 쪽을 받아 들고 우물우물 씹었다. 바나나를 보고 생각한다. 다양성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그 이전에 생존의 조건인지도 모른다고. 획일화는 행, 불행 이전에 안정과 위기의 문제다. 시험 성적 하나로 줄을 세우고, 똑같은 성공과 동일한 기업을 찾아 모든 사람이 내달리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다. 꼭대기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식의 덕목 만을 강조하는 문화는  껍데기뿐인 문화다. 크고 맛있고 경작하기 쉽다고 한 가지 품종만 기르는 사회는, 다가오는 병충해 앞에 멸종의 공포에 떨게 될 수도 있다. 


하여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기를. 


지금은 비록 알이 굵지 않아도, 남들에 비해 수확이 보잘 것 없더라도, 언젠가 오늘의 선택이 자신을 구하고, 세상에 행복을 더할지니. 성장은 다른 것들의 공존에 있고, 기회는 다른 길의 개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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