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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1. 2015

#6 이것은 에세이를 쓰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감동을 줄이는 습관을 쌓다보면 감동이 사라진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에세이를 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2년 반 정도 꾸준히 글을 쓰며 알게된 사실이 있는데, 바로 글쓰기의 7할 정도는 글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어떤 글은 니트로 부스터를 단 레이싱카처럼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내달리는가 하면, 어떤 글은 정반대로 고뇌하는 수도사마냥 고작 한 두 문장을 마치지 못하고 오락가락한다. 차이는 간단하다. 시작하기 전에 확고한 글감을 머리 속에서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 


경험한 일이든, 알고 있는 지식이든 당장 두 손으로 움켜쥐어 접시 위에 올려둘 수 있을 정도로 펄떡펄떡거리는 글감이 있다면 그 글쓰기는 거의 고통없이 진행된다. 그러면 나는 자동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쐬는 푸들처럼 신나게 모니터를 채울 수 있다. 물론 희뿌연 글감으로 시작한 아리송한 글도 일단 쓰다보면 술술 풀리는 경우가 없진 않다. 이 말이 글감이 없어도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경우는 단지 쓰는 도중에 글감을 찾아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손가락 끝에 뇌가 있다'는 소설가 김영하의 표현은 아마 이런 경험의 산물이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글감을 캐치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첫 걸음이, 구상이,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첫 끝발이 강아지 끝발'이란 심심한 자위는 화투장이 뒤엉킨 모포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글감이 펄떡거리는 정도와 그 결과물의 퀄리티는 명백한 인과관계가 있으니까. 주정뱅이처럼 중언부언하는 글이나 실력이 형편없는 외과의사에게 받은 수술자국마냥 흉터가 심한 글을 싶지 않다면, 아니 적어도 지금 쓰고 있는 그 글을 끝까지 밀고 나가 (끝)이라는 단어를 쓸 생각이 있다면, 에밀레 종처럼 속이 텅 빈 머리를 모셔다가 컴퓨터 앞에 앉히지 말 것. 어설픈 글감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문제는 좋은 글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글감은 우리 주위에 있다. 지나간 추억이든, 오늘 겪은 사건이든, 책에서 만난 글귀든, 점심시간 건너편 테이블 손님들의 짜증나는 수다든. 신데렐라처럼 변신할 가능성이 있는 눈부신 글감들은 항상 곁에 널려있다. 다만 그것을 잡아채기가 어려울 뿐. 많은 커플들이 운명의 상대방을 자기 주변에서 찾았노라 증언한다 해서, 자기 주변에서 운명의 상대방을 만나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늘 메뚜기처럼 긴 더듬이를 곤두세워야 한다. 


어떤 날은 먹기 좋은 글감이 저절로 다가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장거리 손님을 태운 택시 기사처럼 룰루랄라 즐겁게 행복을(혹은 자신의 천재성이라 착각되는 무언가를) 만끽하면 된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런 날은 극히 일부다. 꽤 괜찮아 보이는 글감을 겨우 떠올렸는데 막상 조금 끄적거리다 보면 영 아닌 경우도 수두룩 하다. 서울 택시 기사가 전라도 '광주'가는 손님인줄 알고 좋아서 태웠더니 '경기도' 광주인 거나 마찬가지다. 많은 기사님들이 종일토록 강남역 부근을 빙빙 돌며 부지런히 일해야 겨우 하루치 사납금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글감 역시 개미같은 바지런함의 산물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어찌 저럴까 싶을 정도로 많은 글을 빠찡꼬 기계처럼 쏟아낸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톨스토이,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들의 글을 보면 그들이 생산한 엄청난 양의 스토리에 입을 다물 수 없다. 고작 에세이 몇 편을 끄적이면서도 글감의 장기 가뭄에 타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부럽기 그지없는 두뇌 구조의 소유자들이다. 영감인지, 뮤즈인지, 무사이인지, 하여간 그들의 펜대 위에 너울거리는 그 무엇의 치맛조각이라도 움켜쥐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아주 가끔은 나에게도 그 치맛조각이 슬쩍 꼬리 끄트머리를 보이는 날이 있다. 손가락이 레이싱카처럼 내달려서 전라도 광주까지 한 달음에 도착, 운명의 상대를 만나 신데렐라가 된 경험들이다. 비록 길지 않은 글일지라도 그런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써내면 마음이 뿌듯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글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감정(感)이 움직였던(動) 경우. 즉, 감동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감동이 깃든 경험은 무엇이건 간에 풍성한 글감을 남긴다. 단추가 터지도록 웃어댔건, 손톱 자국이 손바닥에 꾹 남을 정도로 화가 났건, 눈물 방울이 책상 위에 동전을 그릴만큼 슬펐건 간에 강렬한 감동은 일상을 이야기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많이 감동하면,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운명의 상대방이 주변에 널린 행운아로 거듭나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하루키도 아마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우고자 노력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강연을 많이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가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강연 다닐 때 제일 힘든 곳이 어딘줄 알아? 기업체야. HR 부서에서 직원 교육차 부르는 거. 물론 페이는 제일 쎄지. 왜 힘드냐면 말이야, 직장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어. 표정도 안 변해. 엄청나게 웃긴 이야기를 하잖아? 그럼 껄껄 웃어주는 사람은 딱 둘 뿐이야. 들어온지 얼마 안된 제일 밑바닥 사람하고, 제일 높은 사람. 신입 직원이야 아직 회사 물을 덜 먹어서 표정이 살아 있는 거고, 사장님이야 남 눈치볼 필요 없는거지. 그 중간 사람들은 아무도 안 웃어. 얼굴이 완전 굳어있어."


회사는 회(會)와 사(社)다. 모일 회와 모일 사. 사람이 모이고 또 모여 회사가 된다. 모이다 보니 연차가 있고, 직급이 있고, 상하 관계가 있다. 업무 상의 상하 관계는 업무 외의 영역에서도 어쨌거나 상하 관계가 된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뒤끝없다고 장담하는 야자타임 중에 뒤끝없는 경우는 없음을 군대에서 학교에서 개그 프로그램에서 누구나 직간접으로 경험했다. 


그러다보니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대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 웃을 때건 화낼 때건 감정(感)의 움직임(動)대로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조직 생활이란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결국 감동을 줄이는 습관이 쌓이다 보면 감동이 사라진 일상을 살게 된다. 



지지난 주였던가, 종아리 인대가 끊어지기 전 어느 주말에 관악산에 올랐다. 이른 아침 강아지를 앞세워 산행하기 좋은 코스가 있다. 흙과 돌을 밟아 30분이면 삼막사라는 제법 큰 절에 닿는다. 갓 도착한 삼막사 마루에 앉아 소매로 땀을 닦고 있는데 대웅전에서 예불 올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예불문이었다. 시계를 보니 마침 10시를 지난 참이었다. 사시(巳時)예불 시간이구나. 몇 년 만에 듣는 예불문이었다. 어디가서 자기 소개서에 종교를 적는 칸이 있으면 불교라고 쓰는 나지만 일요일이라고 절에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법회에 가지 않으니 예불문 들을 일이 귀했다. 간만에 듣는 소리에 옛날 생각이 났다. 



군대 시절 아무도 없는 빈 법당에서 사시마다 혼자 예불을 올렸다. 


쌀을 사지 않는 작은 법당이었으니 밥 공양을 올린 것도 아니었다. 고작 물을 끓여 처음 우려낸 찻물 밖에 공양할 음식이 없었다. 매일 꼬박꼬박도 아니고 그저 짬이 나는 날은 이따금씩. 혼자 목탁을 치면서 부처님이 귀를 막을정도로 고래고래 예불문을 읊어댔다. 눈 밝은 분이 보면 웬 돌팔이 자식이냐고 죽비로 두드려 팰지도 모르지만, 그 때 마루에 엎드려 빌던 말들은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이고 또 진심이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을 다해 귀의하오니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원하옵건대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를."


그 시절에는 고작 배급 건빵을 우유에 말아 먹으면서도 구름을 보면 울컥했고 단풍을 보면 잠시 멈췄다. 새벽 세시, 펑펑 내리는 눈 속에 갇혀 초소 근무를 서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요함으로 곤히 잠들기를 기도할 만큼 마음의 넉넉함이 있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감동이 있는, 그런 시간이었더랬다. 그때 종이에 글을 끄적였더라면 쉬지 않고 달리다가 펜이 먼저 쓰러졌겠지.


글감 하나를 떠올리지 못해 몇 시간이고 며칠을 끙끙대는 지금의 나를 본다면, 그때의 나는 뭐라고 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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