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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0. 2015

#60 창대했던 나의 첫 번째 돈까스

당신은 처음 만났던 돈까스를 기억하십니까

"롬멜 장군은 파리를 향하는 기차의 식당칸에서 비프 커틀릿을 먹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에세이에서 언급한 문장이다. 일체의 수식이 없는 담백한 평서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이 문장에 꽤나 끌렸다고 한다. 롬멜 장군의 빳빳하고 파란 제복과 가슴에 달린 번쩍거리는 은색 훈장, 바삭바삭 튀겨진 비프 커틀릿과 그 위에서 각얼음처럼 녹아내리는 뜨거운 버터가 창 밖의 눈 덮인 풍경과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고. 이렇게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문장을 '열린 문장'이라고 하면서,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힘이야 말로 문장이 가진 매력이라고 하루키는 이야기를 이었다. 


출발은 미미한 비프 커틀릿이었으나 그 끝은 창대한 문장론이다. 역시 대단한 작가다. 


하지만 미미한 나는 비프 커틀릿을 읽는 내내, 창대한 커틀릿을 생각했다. 비프 커틀릿에 이어 떠오르는 생각은 그저 커틀릿일 뿐이다. 그것이 창대한 작가와 미미한 글쟁이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 창대한 커틀릿은 내가 처음 만난 커틀릿이었다. 

열 살이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커틀릿이라는 말도 몰랐다. 그저 '무슨무슨 까스'라는 말도 충분히 이국적으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뒤쪽 어느 높은 빌딩의 2층으로 기억한다. 당시 유행했던 '경양식' 가게였다. 처음 찾은 경양식 집의 처음 먹는 돈까스. 


지금이야 돈까스가 김밥천국에서도 파는 저잣거리 음식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랍스타처럼 신기하고 꽃등심처럼 귀한 음식이었다(시골에서 살았던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당시 우리 집의 지갑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다 비싼 경양식 집을 들어가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는 산타클로스의 방문처럼 이따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돈까스'를 시켰다. 처음 찾은 경양식 집이라 긴장했는지 메뉴를 통일했던 것 같다. 테이블 위에 늘어선 여러 개의 나이프와 스푼, 포크 사이에서 나는 당구 큐대를 처음 잡은 중학생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쪽 팔에 하얀 천을 건 남자 웨이터가 깍듯하게 주문을 받았다. 나는 하얀 천이 자꾸 아기 기저귀처럼 보였다. 손님이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아기의 엉덩이를 닦듯이 그 천으로 스윽 닦아줄 것만 같았다. 


내 차례가 되었다.
"돈까스 주세요"


주문판에 메모를 하며 웨이터가 물었다. 


"빵으로 드릴까요?" 


세상을 살면서,  그때까지 내가 들어본 가장 정중한 목소리였다. 비록 10년도 채 살지 않은 세상이지만 말이다. 열 살짜리 꼬마 손님을 향해 허리를  15도쯤 숙인 깍듯한 자세는 마치 크세르크세스 황제라도 대하는 듯 젠틀 했다. '저희가 제공하는 빵을 드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라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 같았다. 


"빵으로 주세요." 

어찌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으랴. 나는 당연히 '빵'을 택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 가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밥은 무조건 주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밥이 없는 밥상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외식'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그러므로 "빵으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나는 "빵도  드릴까요?"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떡라면에 떡 사리를 넣는다고 라면이 빠지는 것이 아니듯 밥은 기본으로 제공되고, 추가로 빵도 나오는 것이라 이해했다는 뜻이다. 


모든 이해는 오해를 포함한다지만, 오해의 첫 경험이 열 살도 채 되기 전 돈까스에 딸려 나오는 밥과 빵의 문제였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밥도 먹고 빵도 먹고 싶다는 나의 욕심에 지혜의 눈이 잠깐 어두워졌다는 뜻이니까. 그 짧은 시간에  1+1이라는 계산과 오해를 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역시 나는 비만 아동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예전에 만났던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사람은 적어도 다섯 번을 만나지 않으면 얼굴을 떠올릴 수 없대. 평균적으로 그렇다나 봐. 그러니 소개팅으로 한 번 만났다 해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상한 것이 아니야." 


그런가 보다. 그리고 어쩌면 유효한 기억에 필요한 최소 입력 조건은  얼굴뿐만 아니라 음식에도 해당되는 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돈까스의 맛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가 없다. 처음 먹은 돈까스에서 내가 기억나는 것은 모두 돈까스 외적인 것들 뿐이다. 마치 신랑 신부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결혼식처럼 말이다. 

먼저 접시에 담은 수프가 나왔다. 양이 적어서 였을까. 후추가 탁탁 뿌려진 노란 수프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나는 접시의 바닥을 스푼으로 긁으며 여우와 두루미를 생각했다. 두루미도 스푼이 있었으면 맛있게 먹었을 텐데. 여우처럼 혀도 있고, 커다란 스푼까지 손에 쥔 나는 두루미를 놀려대는 여우의 심정으로 깨끗이 접시를 비웠다. 


다음으로 메인 디쉬의 차례. 우리의 메인은 돈까스였다. 예의 그 기저귀 웨이터가 메인 디쉬를 가져와 빵과 함께 내려 놓았다. 흰 접시에 코알라의 코처럼 둥근 빵 두 개가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빵이 있었고, 엄마 아빠 앞에는 밥이 있었다. 나의 빵, 그리고 엄마 아빠의 밥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 밥은 어디 있지?' 


입대 다음 날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 기상 나팔 소리처럼, 포크와 나이프 사이에 놓인 '밥 없는 빵'이 나의 판단 실수를 매몰차게 알려주었다. 나는 철석 같은 확신도 얼마든지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돈까스 집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 순간의 상실감을 손으로 만질 듯 기억한다. 사람은 삶에 필요한 교훈을 여기 저기서 주워 가며 성장해 가는 존재다.

그때였다. 텅 빈 보물 상자를 발견한 허클베리 핀처럼 잔뜩 실망한 나의 눈에 하얀 주사위 같은 것이 보였다. 두 개의 빵 뒤에, 산 그늘에 숨은 오두막처럼, 두 개의 작은 정육면체가 놓여있었다. 내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온 가족이 고개를 쭈욱 빼서 하얀 주사위를 보았다. 엄마 아빠는 밥을 시켰기 때문에 코알라 빵도, 주사위도 없었다. 우리 테이블 위에 놓인 주사위는 내 앞의 두 개가 전부였다. 


"글쎄. 그게 뭐냐?"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역시 모르시는 눈치였다. 


길은 가보면 되고, 책은 읽으면 되듯이, 음식은 맛보면 된다. 먹으라고 준 것인데 먹어보면 될 터. 나는 포크를 들어  그중 한 개를 꾸욱 찔러보았다. 포크는 잘 익은 고구마처럼 쑤욱 들어갔다. 그리고 강낭콩 만한 하얀 주사위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으음... 혀 끝으로 사르르 퍼지는,  
으음... 소리 없이 은은하게 확산되는,
으음... 무색 투명한 유리처럼 새하얀 그것은... 
으음... 


맛이 없었다.


'맛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맛이라 부를 만한 무엇인가'가 없었다. 

느끼하고 아주 약간 짭조름하면서도, 일순간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지만, 그 모든 것을 합쳐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다. 


엄마가 물었다. 
"그게 뭐니?"
나는 펭귄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포크를 들어 나머지 한 개를 집었다. 
냠냠냠. 


하얀 주사위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러니까 정말 나이를 몇 살이나 더 먹고, 우리 집 형편이 좀 나아진 후의 이야기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 빵집이란 것이 생기고, 식빵을 사서 달랑달랑 들고 오기 시작한 뒤의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것은 버터였다.
정육면체로 네모지게 자른 버터. 

그때가 80년 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라는 이상한 캐치프라이즈로 대통령이 된, 귀가 늘어진 사람이 6.29 선언을 하고 나서 아버지의 월급이 오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조합을 만들어 아파트를 지었고, '무주택 몇 년 이상인 자'의 기준에 해당되었던 우리 가족은 다행스럽게도 이사를 했으며, 아파트 상가에는 '돈까스 배달 전문'이라 써붙인 일반음식점이 들어섰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집의 이름은 '보리밭'이었다. 돈까스 배달 전문인 '보리밭'이 영글고 나서야 돈까스는 저 하늘 높은 곳, 랍스타와 꽃등심이 있는 대열에서 내려와 내가 살고 있는 낮은 자리에 임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 돈까스는 24시간 편의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손쉬운 음식이다. 그냥 돈까스로는 성에 차지 않아 치즈 돈까스와 갈릭 돈까스가 등장했고, 5900원에 무한 리필을 해주는 돈까스 뷔페도 생겼다. 버터를 정육각형으로 썰어 주던 경양식 집들은 사라졌고, 수프는 접시가 아닌 보울에 담겨 스푼이 없는 두루미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게 바뀌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돈까스를 먹으며, 언제나 그 창대했던 첫 번째 돈까스를 떠올린다. 비록 돈까스가 아닌 돈까스 외적인 것들만 기억나는 돈까스일지라도, 그 돈까스는 내게 가장 생생히 기억나는 돈가스다. 아무리 많은 돈까스를 맛보아도, 아무리 데미그라스 소스를 넉넉하게 끼얹어도, 가늘게 썬 양배추 샐러드와 싱싱한 옥수수 알갱이를 더 달라고 하더라도, 그 후에 먹는 모든 돈까스는 미미할 뿐이다. '돈까스'라는 말에서 범접하기 힘든 귀한  느낌이 사라지고 나서, 모든 돈까스는 미미해져 버렸다. 


돈까스를 생각하면, 행복의 강렬함이란 꼭 풍요로움과 비례하는 것이 아닌 듯 싶다. 

자못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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