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 교수님이 이태리에서 받았던 첫 레슨
"이태리에 처음 유학 갔을 때 그러셨대."
친구는 노오란 생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남은 맥주 거품이 무대의 커튼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악을 공부하는 친구. 그 친구가 사사하고 있는 교수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이태리로 날아갔다. 보석처럼 빛나는 대학 후배를 만나 결혼한 직후. 학부생 시절부터 권위 있는 콩쿠르에 나가 여러 차례 입상도 한, 촉망받는 테너였다. 이태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어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위대한 성악가로 대성하여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태리에서의 첫 레슨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교외에 있는 작은 집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성악 선생과 수업이 잡혔다. 지도 선생과 허름한 피아노, 통역 겸 반주를 담당하는 아르바이트 생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가 인사를 했다.
통역을 거쳐 레슨 선생이 물어왔다.
"어디에서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선생님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한국의 무슨무슨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무슨무슨 콩쿠르에서 입상했습니다."
어린 아내가 구석의 소파에 앉아 촉방받는 남편의 첫 레슨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오늘 레슨이 다음과 같은 코멘트로 끝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훨씬 유명한 분에게 가셔야겠습니다. 내 소개장을 써 드리지요."
하지만 레슨 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Si(알겠다)."
그리고 바로 수업으로 들어갔다.
"'si'라는 말로 '도'음계를 내보시오."
"......?"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첫 음인 '도'를 'si'라고 발음해서 내 보란 말이오."
레슨 선생의 첫 지시였다.
가장 자신 있는 소절이라던지 유명 오페라의 한 구절을 시킬 것이라 예상했던 선생님은 조금 당황했다.
초등학생 때나 받는 레슨 아닌가.
어쨌든 선생님은 마음을 다잡고 소리를 냈다.
"Si...."
그만. 레슨 선생이 손을 들어 중단시켰다.
"그 소리는 '도'음이 아니오. 다시 내보시오."
피아노 반주 아르바이트 생이 검지 손가락 하나로 "띵"하고 '도'음을 냈다.
"Si...."
그만. 이번에도 손이 올라갔다.
"그 소리가 '도'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지금 '도' 음을 내지 못하고 있지 않소?"
선생님의 표정은 굳기 시작했다. 등줄기에 땀이 났다.
한국의 촉망받는 테너라는 자신감 하나로, 어린 아내의 손목을 잡고 이 먼 타국까지 왔는데, 2류인지 3류 인지도 모르는 선생 앞에서 고작 '도' 음을 내지 못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Si...."
그만.
레슨은 한 시간 내내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끝내 선생이 만족할만한 음은 나오지 않았다. 등줄기의 땀이 줄줄 흘러 발뒤꿈치까지 적실 지경이었다.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즈음, 레슨 선생이 말했다.
"이번 주의 과제는 따로 없습니다. 다음 레슨에는 '도' 음을 제대로 내 오세요."
선생님을 일주일 내내 '도'만 연습했다. 자부심과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몇 년' 안에 '무슨무슨' 상을 받아 어떤 모습으로 고향 땅을 밟겠다는 계획들도 사라졌다. 당장 '도' 음정을 내지 못하는데 무슨 성악가.
일주일이 흘렀다.
레슨 선생과 허름한 피아노, 예의 그 아르바이트 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아르바이트 생이 건반을 눌렀다.
"띵"
"Si....."
짝짝짝짝.
"Bravo!"
레슨 선생은 곰이라도 때려잡을 듯이 우렁차게 박수를 쳤다.
"완벽합니다. 그게 바로 '도'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지난 일주일 간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다른 생각 안 하고 그저 '도' 소리만 냈습니다."
피아노에는 한 옥타브에 12개의 건반이 있다. 7개의 흰 건반과 5개의 검은 건반이다. 온음과 반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 12개의 음으로 담을 수 없는 많은 음이 있다. 피아노 위에는 '도'와 '레' 사이에 '도#'이 있을 뿐이지만, 실제로는 '도'와 '도#' 사이는 견우성과 직녀성처럼 멀다. 그리고 그 공간에도 까치와 까마귀의 숫자만큼 무수히 많은 음이 존재한다.
선생님은 많은 생각을 안고 첫 번째 레슨에 들어갔었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 성공에 대한 열망, 아내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심, 무명의 레슨 선생을 대하는 교만. 잡다한 생각은 불순물이 되어 목소리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불순물의 함량만큼 소리는 '도'가 아닌 그 부근의 어딘가를 방황했다.
하버드 대의 심리학 교수이자 화가인 엘렌 렝거는 초보자가 행운을 얻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가령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골프를 시작하거나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우리는 보통 자신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지 않는다. 초보자로서 자신의 성과에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고 그 일에 뛰어들어서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둔다. 우리는 나중에 비해 처음에는 유연한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 초보자가 행운을 얻는 것은 그 일에 뛰어들어 '오로지 그 일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할 뿐'인 상태일 때, 우리는 괜찮은 글을 쓰며, 볼만한 연기를 하며 레슨 선생이 짚는 건반의 음과 똑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문제는 생각의 불순물에서 온다. 작은 성과에 기대고, 남들의 평가에 신경 쓰면서 '그저 할 뿐'인 자세를 놓치기 시작한다. 슈퍼 루키의 2년 차 징크스와 대형 신인 가수의 2집 증후군은 거기서 비롯된다.
그런 불순물을 일러 우리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저 '도' 소리만 내기를.
그저 꾸역꾸역 공부 하기를.
그저 읽고 쓰고 일하고 연주하기를.
단지 해야 할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오직 그 뿐이다.
창 밖의 저 벚꽃도 온 힘을 다해 피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