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스킨 라빈스에서 늘 민트 초코칩을 주문한다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사무실의 한 분이 다리를 다치셔서 거동이 힘들다. 혼자 드시라고 하기도 뭐하고, 특별히 입맛도 없고 해서 부서원들이 적당히 요깃거리를 사들고 와 사무실에서 함께 끼니를 때웠다. 우리는 슈퍼에 들어가 각자 자기 먹을 컵라면을 골랐다. 왕뚜껑, 튀김우동, 김치 큰 사발 등등 취향따라 컵라면을 비닐 봉지에 담았다.
그런데 한 분이 육개장 사발면을 고집했다. 제일 많이 먹는 농심 사발면 말이다. "부서비로 계산할 거니까 이왕이면 좀 큰 거 들지 그래요?" 생생우동은 아니더라도 큰사발이나 왕뚜껑 정도는 먹어도 되는 상황. 그분은 고작 800원짜리 육개장 사발면을 집어들며 웃었다.
"어렸을 때 수영장에 갔는데 거기서 이 사발면을 처음 먹었어요. 그때 너무 너무 맛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이것만 먹어요."
나도 그런 예가 있다. 내 경우는 라면 대신 '배스킨라빈스 31' 아이스크림 이야기다. 대학교 1학년 초였다. 회식과 술자리가 많은 시절이었다. 소주를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시던 나이다. 녹두거리 입구에 롯데리아가 있고, 롯데리아 위쪽으로 술집들이 즐비했다.
우리가 주로 가던 곳은 롯데리아 지하의 넓디 넓은 호프집이었다. 이름이 '태백산맥'인가 그랬던 것 같다. 소파도 낡고, 안주도 형편없고, 서비스는 더 형편없었지만 그저 엄청나게 넓어서 언제 가도 자리가 넉넉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거기를 아지트로 삼았다. 하기야 미팅과 섬싱이 벚꽃처럼 만개한 그 나이에는 안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거나하게 술을 마시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얼큰한 취기 사이로 선배들의 감시망이 느슨해지면 눈치껏 슬쩍슬쩍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부모님의 통금 시간이나 내일 아침 1교시 수업이 두려워 살그머니 귀가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술기운에 기대 "있지, 나 말이야. 사실은 너를..." 하는 식으로 전화통에 고백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니면, '바람 좀 쐬자' 면서 계단이나 담벼락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나는 통금도 없었고, 전화할 곳도 없었지만, 바람을 쐬는 것 만큼은 무척 좋아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적정 수치를 넘어섰을 때, 달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고개를 꺾어 올려다 보면서 살랑살랑 뺨에 바람을 맞는 느낌이 좋았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쟈."
법대 동기였다. '응답하라 2000'에 여자 주인공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발차기를 잘하고, 달리기는 나보다 빠른, 부산 친구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편의점이 아니라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림동 녹두거리에는 배스킨라빈스가 있었다. 지금은 떡볶이 집이 들어선 그 자리다. 31가지 아이스크림을 유리 진열장 밖에서 바라보니 '와, 많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름은 또 어찌나 길고 복잡한지, '비비빅'이나 '캔디바'처럼 저렴한 메뉴에 익숙해있던 내 눈은 황소처럼 꿈뻑거렸다. 나는 신생아실에 줄지어 누워있는 아기를 바라보듯, 연신 이름과 아이스크림을 매치하며 무얼 먹어야 할지, 또 이건 어떻게 먹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 친구가 익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민트 초코칩 먹을 거다."
나도 자못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나도 그거 한 번 먹어보지 뭐."
"괜찮겠나? 그거 치약 맛이라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한다."
"괜찮다. 어릴 적에는 치약도 많이 먹었다. "
까만 초콜릿 조각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초록색 민트 아이스크림. 내가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제일 처음 먹어본 메뉴. 초콜릿과 치약이 혀 끝에서 같이 녹는 그 맛이 실로 환상적이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종종 네 가지 맛 쿼터를 사들고 집에 돌아갈 만큼 나도 배스킨라빈스에 익숙해졌다. '엄마는 외계인'이나 '체리 쥬빌레'처럼 특이한 메뉴도 수월하게 주문한다. 하지만 세 가지를 사던, 네 가지를 사던 지금도 나는 '민트 초코칩'을 빠뜨리지 않는다.
'치약 맛 나는 아이스크림이 도대체 뭐가 좋아'라고 가족들이 한 마디씩 해도 꿈쩍 않는 나다. 분홍 플라스틱 숟가락에 앉아있는 민트 초코칩은 언제나 스무 살의 봄 밤처럼 그대로 있다.
사람에게는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자신만의 기호'가 있는 것 같다. 콜라가 좋아 콜라만 마시는 사람도 있고, 스웨터가 좋아 스웨터만 입는 사람도 있다. 옷장 안에는 온통 회색 옷만 가득한 사람도 있으며, 매번 질리지도 않고 참치김밥만 고르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그것을 좋아하게 되셨습니까?" 하고 그들에게 물으면 첫 만남이랄까, 소중한 추억이랄까, 생생한 기억을 생일 선물처럼 끌러놓기 시작한다.
나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 끈의 한쪽 끝을 잡은 채로 다른 한쪽 끝에 붙잡아 맬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어떤 사람의 끈은 민트 초코칩에 닿아 있고, 또 어떤 사람의 끈은 육개장 사발면에 닿아있다. 경험이라는 실타래를 엮어 만드는 그 끈을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인연이 닿은 모든 것들은 우리의 '작지만 확실한 자신만의 기호'가 된다. 플란넬 셔츠와 감색 슈트를 즐겨 입고, 비 오는 날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향을 그리워하며, 그늘 진 벤치에 앉아 일본 작가의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소소한 것들 말이다.
앤서니 라빈스는 말하길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목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충만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작지만 확실한 자신만의 기호'들을 많이 갖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배지처럼 반짝이게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나는 따끈한 와퍼를 한 입 깨물 때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기가 좋고, 재래시장에서 방금 만든 두부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떼어 먹는 것이 좋다. 검도장을 나설 때 온몸을 감싸는 시원한 바람이 좋고, 다 쓰고 난 글을 프린트하여 클립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좋다.
또 무엇이 좋아지게 될까.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이 닿는 곳마다 '작지만 확실한 자신만의 기호'를 발자국으로 남길 수 있으면 그 또한 살만한 인생인 것 같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스크림을 쿼터로 사서 들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