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유일'한 사람이 되고자 할 뿐
정말이지 나는 하루키 같은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하루키 같은 에세이가 어떤 에세이냐' 고 묻는 사람은 아마도 하루키의 에세이를 한 번도 본 일이 없거나, 윗 사람 세 명이 한 국자씩 먼저 뜨고 난 서더리탕의 살점처럼 아주 드물게 구경한 사람일 것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상실의 시대>처럼 가슴 아리거나 <1Q84>처럼 난해할 것이라 예단한다면 큰 착각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하루키의 소설과는 지극히 다르다. 이를테면 그것은 2분만 익히면 먹을 수 있는 가느다란 면발의 컵라면처럼 편리하고, 외국에 사는 삼촌이 준 꼬부랑 글씨의 초콜릿처럼 설레며, 신학기 학생회관에서 3500원에 제공되는 새싹 비빔밥처럼 신선하다.
이렇게 써 놓아보았자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울 테니 번거롭지만 한 편을 옮기기로 하겠다.
<맛있는 두부를 먹기 위한 요령>
안자이 화백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두부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두부를 좋아한다. 맥주와 두부, 토마토와 풋콩과 가다랑어 말린 것만 있으면 여름의 저녁은 극락이다. 겨울에는 삶은 두부, 기름에 튀긴 두부, 구운 두부 어묵국 등 어쨌든 춘하추동을 불문하고 하루에 두부를 두 모는 먹는다. 우리 집은 요즘 밥을 먹지 않으니까 실질적으로 두부가 주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친구가 집에 찾아와 저녁식사를 내놓으면 모두들 '이게 식사야?' 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맥주와 샐러드, 두부, 흰 살 생선과 된장국으로 끝나버리니까 말이다. 그러나 식생활이란 것은 결국 일종의 습관이어서 이런 것들을 계속 먹고 있으면 그게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일반적인 식사를 하면 위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우리 집 근처에는 손으로 만드는 상당히 맛있는 두부 가게가 있다. 나는 점심 전에 집을 나와 책방이나 레코드 대여점이나 게임 센터에 갔다가, 분식집이나 스파게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반찬거리를 산 후 마지막으로 두부를 사 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맛있는 두부를 먹기 위한 요령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두부를 살 것(슈퍼는 안된다). 또 하나는 집에 돌아오면 즉시 그릇에 담에 물을 부은 후 냉장고에 집어 넣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온 그날 안에 먹어야 한다. 그러니까 두부 가게는 반드시 집 근처에 있어야 한다. 멀리 있으면 일일이 부지런을 떨어가며 사러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평소처럼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두부 가게에 들러보니까 셔터가 내려져 있고, '점포 임대함'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항상 싱글벙글 사람 좋던 두부 가게 일가가 돌연 가게 문을 닫고 어디론가 떠나가버린 것이다. 앞으로 나는 도대체 어디서 두부를 사야 한단 말인가?
-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
이상이 하루키가 쓴 에세이 한 편의 전문이다. <맛있는 두부를 먹기 위한 요령>이 하루키의 대표적인 에세이일리는 없지만, 수많은 에세이 중에 대표적으로 여기에 옮겨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숱한 에세이들이 죄다 저런 식이기 때문이다.
하루키 에세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별 일이 아닌 것을 소재로 쓴다.
둘째, 별 내용이 없어도 재미있게 쓴다.
셋째, 별 볼 일 없는 글이라 그런지 짧게 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에세이가 실렸다면, 아마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으리라.
"<맛있는 두부...>는 이상과 같은 하루키 문학의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으로서, 그의 문학성과 실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작품으로 어쩌고 저쩌고."
그러므로 내가 하루키 같은 에세이를 쓰고 싶다 함은 저 세 가지 특징 때문이다.
첫째, 별 일이 없어도 글을 쓰고 싶다.
둘째, 별 내용이 없어도 재미있게 쓰고 싶다.
그리고 셋째, 무엇보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 데 '짧게' 쓰고 싶다.
내 글은 이상하게도 항상 만연체로 흐른다. 내가 처음 글을 습작한 것이 연애편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훈이 먹을 것 없는 엄동설한의 남한산성을 묘사하듯 차갑고 단호하며 치열하게 쓰고 싶은데, 줄줄줄 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한산성의 돌 틈 사이로 젖과 꿀이 줄줄줄 흐르고 있다. '아차' 싶어 깨닫고 보면 이미 네덜란드 댐의 구멍처럼, 하자보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짧게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어려운 점을 겪을 수밖에 없다.
첫째, 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둘째, 그러므로 매일 쓸 수 없다.
셋째, 메시지가 없으면 쓸 수 없다.
하루키의 에세이처럼 <맛있는 두부를 먹기 위한 요령>이나 (맛있는 라면을 먹기 위한 요령이라면 나도 있는데), <내 잠버릇의 3대 특징>이나 (낭만적인 것도, 에로틱한 것도 없지만 내게도 3대 특징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 <젊었을 때 번번이 실패했던 연애> 같은 (이건 제목 그대로 써도 무방할 듯. 실로 유감) 것들을 마구잡이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늘 주절주절 순대국밥집 할머니의 수다와도 같은 긴 글을, '무슨 일이 생겨야 연락하는 뜨악한 친구처럼' 번듯한 메시지가 있어야 키보드를 잡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별 일이 아닌 것을 소재로 쓰고, 별 내용이 없어도 재미있게 쓰고, 무엇을 쓰던 짧게 쓰는 것이 하루키의 내공이겠거니,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쓰다 보면 짧아지는 칫솔처럼, 내 에세이 역시 쓰다 보면 짧아지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에 답을 미뤄두었다.
어제였다. 트위터를 넘기다가 이런 글을 보았다.
나는 출퇴근 길을 걸으며 트위터를 읽는다.
"8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 교토 대학의 모토 :
세계 제일이 아닌 세계 유일을 추구한다.
반드시 1 등할 필요는 없다. 그냥 유일한 연구자가 되면 된다."
걸음을 멈추었다. 3호선 불광역, 2번 출구 아래 천 원짜리 커피집 옆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글을 쓸 수는 없더라도 유일한 글을 쓰면 되지 않을까. 최고의 책을 위해 깎고 잘라 스스로 작아지느니 유일한 책을 길러내어 풍성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최고의 작가만 바라보며 좌절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보다, 유일한 작가라는 꿈을 품고 글자마다 행복을 써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순간 까스 활명수를 마신 듯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갔다.
완전한 답을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완벽한 오답에서는 한 발자국 비켜선 것도 같았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느냐는 계속 고민할 문제다. 이러다 또 사나흘이 지나면, 팅팅 불은 안성탕면을 앞에 두고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일까'라고 자책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려면 어떠냐. 삶이란 멀리서 보면 물결 위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눈부실 지라도, 하루하루는 페달을 밟는 오리배처럼 삐걱거리는 물건들이다. 그 삐걱거림을 끌어안고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우스꽝스럽게 기우뚱하면서도 전진하여야 한다. 주절주절 늘어지는 긴 이야기일지라도 끄적끄적 써야 한다.
그러다 보면 혹시 모른다.
별 일 아닌 일을, 그다지 재미없어도, 한여름에 쭈욱 늘어지는 껌처럼 만연체를 쓰는 유일한 작가가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