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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3. 2015

#79 파울로 코엘료의 글쓰기 힌트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인상적인 글을 만든다

간만에 지인과 전화통화를 했다. 


사보(社報)를 만드는 부서에서 일하는 분이다. 마감이 있는 일을 하다 보니,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나 보다. '잘 지내지?' 물어볼  때마다 '힘들다 힘들다' 소리다. '힘들다'고 말한 지 몇 년은 되었는데, 그래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다. 중간에 한 번 이직을 했지만 여전히 사보 만드는 부서로 가는 것을 보니, '힘들다' 하면서도 어쨌거나 일처리는 잘 하는 게 분명하다. 적어도 맡은 일에 구멍은 내지 않을 사람이다. 


글쓰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지인이 물었다.

"너는 블로그 글 하나 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대답을 하려고 생각해보니 애매하다. 새로 산 프라이팬에 싱싱한 달걀을 '탁' 하고 깨뜨려서 야들야들한 흰자가 파파파팟 익어가는 속도로 순식간에 써지는 글도 있고, 파도의 발가락 끝이 닿는 지점에 쌓아 올리는 모래성처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글도 있다. 


에세이는 본래 '경험한 일'에 대해 '형식의 제한 없이' 쓰는 글이다 보니 편차가 그야말로 제멋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글 쓰는 속도는 '무엇을 쓰느냐'에 달려 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감이 충만한가'에 달려있다. 물론 부차적으로는 혈중 카페인 농도가 적당한지, 푸들이 안아 달라고 보채지는 않는지,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악성 코드가 감염' 어쩌고 하지는 않는지 같은 변수도 작용하지만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끄적거리면서 규칙적으로 지면을 채우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름의 노하우랄까, 체념이랄까.


바로 '안 되는 글은  안된다'는 사실이다. 

'안 되는 글'은 파도의 손 끝이 닿는 지점에 쌓는 모래성과 같다. 한 숨 한 번 쉬고 한 문장을 쓰고, 하늘 한 번 쳐다 보고 한 문장을 쓴다. 어찌어찌  한두 문단을 쓰다가 시선을  30cm쯤 떼어놓고 보면 이건 뭐 웬 강아지 짖는 소리다. 결국 문단 째 Del 키나 Ctrl+x를 눌러 지워버리기 일쑤다. 이러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원고지 앞에 앉아 '세미콜론을 콜론으로 수정했다'는 어느 위대한 작가의 작업량이 과장이 아니다. '바늘로 우물 파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던 오르한 파묵의 고백도 거짓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뼈를 깎는 시간을 들여서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문장을 빚어내기라도 하지, 나에게 남는 건 고작 '허생의 즐거운 편지' 블로그 글 한  조각뿐.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작가는 고사하고 블로그 이웃마저 이사를 가버릴 성 싶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안 되는 글'은 두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첫째,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메시지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길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라고 했다. 


둘째, 내 깜냥으로 커버할 수 없는 주제인 경우. 두루미가 제 목구멍보다 큰 물고기를 삼키면 기도가 막혀 죽는다. 내 글이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써니힐의 노래도 아니고, 몇 번쯤 Del 키가 등장하면 예외 없다. 


이건 '안 되는 글'이다.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를 읽다가 봄바람이 뺨을 스치듯 '문득' 든 생각이 있어 키보드를 잡았는데 시계의 긴 바늘이 360도 한 바퀴를 부지런히 도는 동안 한 문단을 채 넘지 못했다. '한 시간 동안 한 글자도 못 썼다는 말이냐'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쌓았다 허물고 쌓았다 허물고를 반복했을 뿐이다. 


통째로 삭제해버린 문장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20대 중반의 어느 즈음이었던 것 같다.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0대의 청년들은 종종 20대가 얼마나 눈부신 시간인지 모른다. 돈을 재미로 강물에 던지는  어린아이처럼, 귀한 시간들을 흐지부지 보내곤 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때의 추억을 추려 벽에 꽂아두려 해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그저 흐릿할 뿐이다. <연금술사>를 만났던 것은 그 즈음의 일이다." 


'추억을 추려 벽에 꽂아두려 해도 어디 두었는지  흐릿하다'는 문장을 다듬고 고치니, 내 정신이 다 흐릿하다. 넝마를 깁다가 심신이 넝마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시절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는 서점이 있었다.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서점이었다. 주로 수업용 교재들을 팔았고, 학교 출판부에서 찍은 (좀처럼 팔릴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책들이 벽마다 빼곡했다. 나는 그 서점 구석에 서서 <연금술사>를 읽었다. 당시에 제일 '핫'한 책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아름다운 문구가 싸이월드 대문마다 넘실거렸다. 엄청나게 유명하다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책이라고 했다." 


학교 서점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아름다운 감상에 젖고 싶었는데, 이런. 한 시간 째 Del 키를 누르고 있으니 내 영혼이 추우욱 젖어버린 건 감상이 아닌 무기력이다. 


문장 하나하나만 보면 나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문장만 나쁘지 않다고 무얼 하겠는가. 역시 문제는 둘 중 하나.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나조차도 모르거나, 하고 싶은 말이 내 능력을 벗어나는 거다. 

<연금술사>를 읽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인상적인 글을 만든다." 


좋은 글의 서두에는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글 전체에서 던지고 있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메시지다. 디즈레일리는 "현자의 지혜와 노인의 경험은 인용을 통해 영원을 얻는다"고 했다. 거기에 기대 수저를 얹으면 "좋은 글과 훌륭한 메시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영원을 얻는" 셈이 된다. 


<연금술사>의 서문에는 '누가복음'의 한 대목이 나왔다. 


예수님이 어느 집에 머물렀다. 동생 마리아가 집안 일은 제쳐둔 채 예수님 옆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그러자 언니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한다. "옆에 있는 제 동생더러 같이 일을 거들라고 말 좀 해주세요."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를 내버려두거라." 

파울로 코엘료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특사로 파견되는 것과 같아서, 해야 할 한 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일을 해내더라도 소용이 없다." 


<연금술사>는 코엘료가 87년에 발표한 책이다. 30년 가까이 지난 글이다. '하나'를 해라.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해라.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라. 코엘료는 사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같은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연금술사> 서문의 '누가복음' 한 대목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글을 쓸 때는 그런 이야기를 실어야 한다.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문을 열어야 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명사의 어록을 한 챕터마다 서너 개씩, 피자 토핑처럼 얹는 것은 그런 이유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주장이 아닌 이야기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마다 가능한 메시지를 머금은 에피소드를 첨가해야 한다. 그것이 멋진 글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아마 좋은 강연을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연금술사>의 서문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인상적인 글을 만든다. 파울로 코엘료가 힌트를 준 글쓰기 비법인 셈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조금 전에 한 시간이 넘도록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이유를 알겠다. 


고작 '반드시 멋진 에피소드 하나 씩을 글에 담을 것' 이란 한  줄짜리 깨달음을 줄글로 늘여 쓰려니 분량이 나오지 않았던 거다. '안 되는 글'이었던 두 가지 이유 중, 구태여 꼽자면 두 번째 이유, 분량을 채울만한 깜냥이 되지 않아서 였다. 감자칩의 진공포장은 바늘 구멍 하나만 나도  푸시시하고 빠지게 마련이다. 내용물이 적으니 외관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 


전화 통화가 끝날 무렵 지인은 "다음에 보거든 글 쓰는 노하우 좀 가르쳐 주라"는 말을 했다. 글 쓰는 노하우가 뭐 따로 있나. '안 되는 글' 만 아니면 어쨌거나 분량은 채울 수 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은 꾸역꾸역 모니터를 채워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초콜릿 상자에 리본을 달듯 멋진 장식을 얹고 싶다면 바로 이 글에 힌트가 있다.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넣을 것.

사람들은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를 기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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