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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ug 17. 2015

#95 출근길에 서태지의 <하여가>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잘 견뎌왔다고 스스로를 토닥일 날이 올게다 

지금은 완전히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에는 시장 거리에 가면 노래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가 있었다. 


거기에는 가수의 정규 앨범도 있었고, 가수의 정규 앨범인지 의심이 되는 것도 있었으며, 외국 가수의 앨범도 있었고, 외국 가수의 ‘앨범’이라고 차마 부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이른바 ‘해적판’ 테이프다.


‘해적판’ 테이프에서 단연 인기 있었던 것은 잘 나가는 노래들만 모아서 따로 찍어낸 <인기가요 베스트>였다. 누가 정한 베스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이프 하나로 최신 히트곡을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으니 선정 기준의 공정성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는 IMF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이었다. 나는 연립일차방정식에 쩔쩔매고 내 호주머니는 200원짜리 풀빵 하나에 쩔쩔매던 중학생 시절이었다. 돈은 없지, 노래는 듣고 싶지, 장기 자랑을 하면 친구들은 멋지게 김종서나 서태지를 불러대지. 나는 <인기 가요 베스트> 테이프가 몹시도 갖고 싶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공 테이프에 라디오 방송을 녹음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Record 버튼과 Play 버튼, 이렇게 두 개만 조작할 줄 알면 새처럼 호로록 날아가 버리는 라디오 방송의 한 허리를 확 낚아채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듣고 싶은 만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축음기에 동요를 녹음한 에디슨처럼 기뻐했다. 


당시 라디오 가요 프로그램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금주의 베스트’를 방송하는 시간이 있었다. 일요일 정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 횟수나 앨범 판매량을 집계해서 20위부터 1위까지의 노래를 학급의 등수를 부르듯이 차례로 들려주었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아 Record 버튼과 Play 버튼에 손끝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꼬박 작업해서 나만의 <인기 가요 베스트>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들었다. 듣기도 많이 듣고, 부르기도 많이 부른 노래다. 그 시절 ‘하여가’는 학급 장기 자랑의 단골 메뉴였고, 1분 남은 노래방의 피날레였다. 아마 90년대의 노래들을 모아 나라를 만든다면 ‘하여가’가 초대 임금의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하여가’ 하면 김종서의 날카로운 고음을 기억하는 사람도, 신선한 태평소 가락을 떠올리는 사람도, 혹여 태종 이방원부터 생각하는 모범생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MC 허수경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 아닌 국민학생이었고, 국민학교의 이승복 동상만큼이나 흔하게 생긴 카세트에 매달려서 <인기가요 베스트> 테이프를 만들고 있었다. 녹음할 때 변수는 MC의 목소리다. MC가 곡명을 소개한 후 자기 마이크를 꺼버려야 일출봉에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처럼 선명하게 전주부터 빠트리지 않고 녹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번 주 6위  곡입니다. 김종서가 부릅니다. ‘겨울비.’

(Record와 Play 딸깍)...(몇 초간 침묵)...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를, 이 순간 부를 까아.” 


하지만 이따금씩 MC가 멘트를 하는 도중에 이미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본인은 남은 대본을 끝까지 읽으려는 생각이겠지만, 나 같은 ‘음반 제작자’에게는 MC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잡소리’였다.  


나는 ‘하여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20위부터 2위까지 성공적으로 녹음을 마쳤고, 대망의 1위 곡인 ‘하여가’가 나올 차례였다. 나는 이제나 저제나 미스코리아 진 발표를 기다리는 참가번호 1번의 가족들처럼 검지와 중지를 Record와 Play 버튼 위에 올려둔 채 긴장하고 있었다.



‘하여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전주가 막 나오는 참이었다. 나는 놓치지 않고 두 손가락을 꾹 눌렀다. 테이프는 9와 3/4승강장에서 호그와트로 출발하는 기차 바퀴처럼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허수경의 멘트가 따귀처럼 날아들었다. 


“‘하여가’ 참 대단했어요. 거리에는 어디를 가나 말이죠.”


그 테이프를 많이도 들었다. 인터넷이 생기기 전까지 내가 들은 모든 ‘하여가’는 그 테이프의 ‘하여가’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허수경의 멘트가 돈가스의 수프처럼 먼저 나왔다. 


“‘하여가’ 참 대단했어요. 거리에는 어디를 가나 말이죠.”


따귀를 자주 맞는다고 좋아지지 않듯이 매번 듣는 멘트라도 매번 짜증이 났다. 김종서의 멋진 고음을 제대로 들을 수도, 전주의 두근대는 흥분을 마음껏 맛볼 수도 없었다. 하필 허수경은 그 부분에 말을 해서 나를 방해했는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나도 아저씨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고, 젤을 발라 머리를 고슴도치로 만들었던 양현석은 대형 기획사의 회장님이 되었으며, 놀랍게도 서태지는 열여섯 살 어린 신부와 결혼을 발표했고, 그러는 동안 <인기가요 베스트> 테이프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공 테이프 만한 스마트폰으로 ‘하여가’를 들으며 나는 지나온 시간과 함께 허수경을 생각한다. 조개 살에 박힌 모래가 진주로 변하듯, 그렇게 귀에 거슬리던 소리였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럭저럭 추억거리가 된다. ‘이 부분에서 항상 그녀의 멘트가 나왔지. 그때는 참 싫었는데’ 하고 피식 웃게 되는 것이다. 치고 박고 싸웠던 초등학교 친구를 동창회에서 본 반가움이랄까. ‘하여가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말할 사람들은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우고도 남겠지만, 그들 중에 허수경의 목소리까지 덤으로 떠올릴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붓다가 말하길 ‘인생은 고(苦)’라고 했다. ‘고’는 원래 산스끄리뜨어로 두카(Duhkha)다. 흔히 착각하듯이 두카는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드는 자잘한 귀찮음 혹은 불만족 정도로 해석해야 맞다. 경전에는 수레바퀴의 이가 빠져서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불편함을 두카에 비유했다. 


‘하여가’를 들을 때마다 짜증을 안겨준 허수경의 멘트는 그 시절의 두카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위에 진로의 두카, 직장인의 두카, 결혼 자금과 고혈압의 두카 같은 것들이 퇴적물처럼 켜켜이 쌓였다. 허수경의 두카는 저 아래에 말없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시간의 압력을 받아 화석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저런 두카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하여가’를 들으며 이겨낼 수 있는 이유 한 가지를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두카는 다른 두카에 밀려 기억의 퇴적층 저 아래에 묻힐 것이다. 소주병과 담뱃재로 견뎌내는 오늘의 두카도  그때가 되면 고작 하나의 화석으로 남을 뿐이다.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화석 말이다. 


우리는 그 화석을 일러 추억이라 이름 붙인다. 추억의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며 ‘저런 시절도 있었지’ 하고 씩 웃는다. 하나의 두카가 하나의 웃음이 된다. 그 웃음이 모여서 살아온 의미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의 두카도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두터운 페이지를 쓰다듬으며 ‘잘 견뎌왔어’ 하고 스스로를 토닥일 날이 올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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