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경우의 수를 따져본다면...
모든 일을 마치고
시계를 바라보니 5시 53분.
오늘은 오후 6시 정시에 퇴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팀장님의 기분, 사수의 번개 술자리 제안, 남은 7분 안에 내가 맡아야할 일이 내려질 경우, 혹은 그 안에 내가 맡은 영역에서 특정 이슈가 생길 경우 등등... 많은 배반을 당해보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시 빌어본다. 이 7분만은 아무런 탈없이 지나가기를. 지난 날의 배반은 내 넓은 아량으로 눈 감아 줄테니, 오늘 만은 무사히 퇴근하여 좋은 기분으로 퇴근할 수 있길.
정시퇴근을 할 때는 기분이 좋지만, 유난히 기분이 좋은 날이 있다. 일이 잘 풀리거나, 칭찬을 듣거나, 선하고 배려하는 일을 하고나서는 퇴근할 때 은근히 기분이 좋다. 특별한 성과가 났거나, 대단한 이벤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다가 내가 제시한 특이점이 받아들여진 경우, 일상적인 일에 대한 변수를 검토하여 작은 불상사를 막아낸 경우, 평소엔 어렵게 느끼던 일이 수정에 수정을 거쳐 어느새 예전보다 수월해졌다고 느낄 때. 그런 날이면 아무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비가와서 바지가 좀 젖어도 '뭐 그럼 좀 어때'하면서 집에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빨래를 하게된다.
아쉬운 점은 이런 날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일의 양으로 놓고 보자면, 대부분 너무 과하거나 밀려있다. 타이밍적으로도 급하게 오는 일들은 참 밉다. 팀의 일원으로서 이해되는 부분들이 많으니까 더욱 그렇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 구조를 바꿀 수 없는 위치이기에, 그저 깊은 한숨을 시작으로 일을 진행하곤 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면 나의 에너지를 과소진 하는 날이 대부분이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며, 누군가 나를 '노련해졌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들이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고, 이는 직장에서 느끼는 좋은 감정들의 최대치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고 느낀 적이 있다. 프로젝트를 훌륭히 수행하고 마쳤을 때, 신입사원이 느끼는 감정과 팀 리더가 느끼는 감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 할 수록, 프로젝트 클로징의 기쁨보다, 프로젝트 중간의 고됨에 지치고, 이는 클로징의 기쁨을 퇴색시키는 듯 보인다. 프로젝트든, 직장생활이든, 아무 문제 없이 순탄할 가능성은 적고, 그 과정에서 나의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 간다.
그럼에도 오늘은 내 평생 직장생활 중, 몇 안되는 깔끔하면서도 기분좋은 정시퇴근일이다. 소소한 칭찬도 들었고, 나 스스로도 이전에는 못했을 법한 일을 수월하게 해냈으며, 팀장님이 웃으면서 잘가라고 해줬다. 퇴근하는 지하철은 보통보다 조금은 널널했고,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에 신호를 기다리며 보이는 하늘이 멋졌다. 집에오니 어제 청소를 해놔서 그런지 말끔했고, 해놓은 반찬도 넉넉해서, 밥만 새로지어서 먹으면 될 것 같다.
오늘 같은 날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힘들 때마다 기억할 것은 맑은 날은 언젠간 올 것이다.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