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지나간 시간에 대한 되도 않는 투정 한 더미
야, 우리 너무 나이 먹었다.
이런 말 하기에는 참 어린 나이라는 것도 안다. 직장 생활 시작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위로는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이 까마득하다. 학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직장에 들어가고 보니, 그것이 시작이었다. 학교 졸업도 힘들었는데, 그것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만한 고되고 무거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직장의 업무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부여되는 사회적 책임도 포함된다.
친구한테 말한 우리가 나이들었다는 말은 사실 우리 나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같이 공부를 하고 사회생활을 준비했는데, 그 과정을 끝낸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합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하지만 합격보다는 뭔가 더 복잡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무엇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살게된 우리 사회는, 평균적인 삶에 대한 인식도 같이 높아졌다. 부모세대보다 잘 살고 있는데, 왜 힘들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존중한다. 이것이 SNS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과연, 나의 서른이 부모님의 서른보다 잘 살고 있고, SNS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덜 힘들었을까.
옛날에 신입 막내사원들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푸념을 했을까.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본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나쁘지 않았다.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고, 사회는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 흐름 속의 나 또한 그러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젊었으며,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나는 아주 젊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이가 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발전할 만큼 발전한, 고도화된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작아보였다. 이미 많은 경쟁을 거쳐온 지난 날의 성과는 이미 빛 바랜지 오래다.
그러다보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말도 안되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6년이 너무 긴 것 같다며, 생산가능 인구 증대를 위해 초등학교를 4년으로 줄이자는 등. 중고등학교도 합쳐서 3년으로 줄이자는 등. 아무래도 6살이면 초등학교를 가도 되지 않냐는 등. 6살에 입학해서 초등학교 4년, 중고등학교 3년이면, 14살에 대학을 가서 18살에 졸업을 하는 획기적인 계획. 이제 우리 중에 한 명이 교육부를 가는 일만 남았다.
어쩌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벽을 마주한 내 자신이 너무 작아보여서 그런 듯 하다. 조금만 이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뭐든지 더 배우고 능력을 키웠었더라면 내가 좀 더 클 수 있었을까. 돈이 좀 더 많지 않았을까. 한국사람들은 주변 문제에 대해서 내 탓을 하고 나한테서 문제를 찾는다고 하던데, 나 역시 착하디 착한 한국사람인가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푸념은 점심시간으로 끝내도록 한다. 화려한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과 과도한 자기반성도 그만둔다. 내가 화가라면, 오늘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작가라면, 오늘 써내야 하는 글을 미루지 않는 것이 목표이다. 회사원이라면, 오늘 해야하는 일을 미루지 않음과 동시에, 나를 위한 일을 미루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늘 또한 지나갈 것이고, 그것은 또 어제처럼 그런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렇게 나의 내일이 변화됨을 믿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