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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는 큰 상자에 담겨 도착했다. 상자를 열자 부품들이 차례로 나왔다. 생각보다 부피가 커서 책상 위에 둘 수 없었다. 중형 오븐을 위로 더 늘려놓은 크기였다.
확장된 발코니의 구석을 비우고 거치대를 놓았다. 거치대 중간 단에 본체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무게가 제법 나갔다. 설명서를 펼쳐 놓고 순서대로 따라 했다.
전원 케이블을 먼저 꽂았다. 연결선 몇 개가 더 있었다. 하나씩 해당 포트를 찾아 연결했다. 포트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필라멘트를 거는 구조를 확인했다. 필라멘트 묶음인 릴을 본체 위쪽 홀더에 걸고, 빨대 정도 굵기의 필라멘트 끝을 노즐 쪽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끝부분을 잘라 정리한 뒤 연결했다. 출력될 재료가 준비되었다.
전원을 켜고 메뉴를 눌러봤다. 언어를 한국어로 선택하고 기본 설정을 확인했다.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짧은 기계음이 났다. 노즐이 움직이며 자동 점검을 진행했다. 화면에 준비 완료가 표시됐다.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 설계할 능력이 없었다. 제조사 커뮤니티에서 테스트용 모델을 골랐다. 여러 조각이 연결된 다관절 구조의 피젯 장난감이었다. 출력이 끝나면 관절이 바로 움직인다고 했다.
필라멘트는 연두색과 주황색 PLA를 섞어 쓰기로 했다. 집 안에서 다루기 무난한 재료라고 했다. 연두색과 주황색은 선명해서 출력 과정이 잘 보일 것 같았다. 첫 출력이니 진행 상황을 명확히 확인하고 싶었다.
출력 버튼을 눌렀다. 노즐이 바닥을 훑으며 녹인 필라멘트를 얇게 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처럼 보였고, 같은 동작이 반복되며 쌓인 형태가 점점 드러났다. 화면에는 남은 시간이 표시됐다.
자리를 떴다. 프린터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물을 마시고 돌아왔다. 아직 10% 진행 중이었다.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다가, 프린터 소리가 들려서 가 봤다. 층이 쌓일 때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소리였다. 모터와 노즐이 움직이는 소리가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됐다. 가끔 방향이 바뀔 때 정지했다.
중간쯤 지나자 형태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유리문 안쪽으로 보이는 건 납작한 층들이었다. 위로 쌓일수록 구체적인 구조가 보였다.
90분쯤 지나자 출력 완료 메시지가 보였다. 프린터 앞으로 가서 문 안을 들여다봤다. 소개 페이지에서 본 것과 같은 장난감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두색과 주황색 줄무늬의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집어 보니 가벼운 저항 후 바닥에서 뜯어졌다. 아직 따뜻했다.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표면에는 층층이 쌓인 미세한 결이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문질러보니 주름 같은 일정한 단차가 느껴졌다.
관절을 움직여봤다. 각 조각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조각들 사이에 틈이 거의 없었다. 출력과 함께 그대로 맞물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한 꼭짓점을 올리거나 내리면 나머지 조각들이 따라오며 형태가 바뀌었다. 삼각형이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계속 움직이다 결국 처음 모양으로 되돌아왔다.
화면 앞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이 장비로 무엇을 먼저 해보는지 물었다. 금속이나 기타 공예 작업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지 물었다. 답변에는 형태 확인, 구조 테스트, 치수 검증 같은 내용이 있었다.
질문을 바꿨다. 설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CAD였다.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지, 어떻게 배우는지 물었다. 답변이 길게 이어졌다. 어떤 프로그램은 기계 부품에 강하고, 어떤 것은 곡면 작업에 적합하다고 했다. 학습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튜토리얼을 따라가거나, 간단한 형태를 반복해서 그려보는 방법도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스트랩처럼 휘는 물건을 설계하려면 어떤 프로그램과 작업 방식이 적합한지, 설계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답변은 도구와 작업 순서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화면을 오랫동안 보면서 이따금 장난감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든 물건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화면 속 질문들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 알림이 보였다. 이번 달 지출이 평소보다 많다는 내용이었다. 3D 프린터, 필라멘트, 스트랩 샘플, 주얼리 재료비. 지난달과 이번 달을 돌려가며 비교했다. 지출이 두 배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