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지는 방

8-1

by KJ

한동안 앉아 있었다. 서향인 서재의 뒤쪽에서 보이던 햇빛이 어느샌가 정면으로 난 창으로 비췄다. 가끔 무엇인가를 타이핑하고 답도 읽곤 했지만, 눈에 초점이 또렷이 잡히지는 않았다.


AI와의 대화도 그대로였다. 기존 주제를 생산적으로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대화는 없었다. 배부른 자가 하릴없이 냉장고를 열어보듯, 대화방을 하나씩 열어보고 있었다.


웹브라우저를 열고 추천된 영상을 찾아봤다. 검색어를 넣지 않고 썸네일과 제목을 흘려보냈다. 원하는 영상을 골라 보는 시대가 열렸지만, 사람들이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연말을 의미 있게 보내는 법, 크리스마스트리 만드는 법 등의 영상을 열어 봤다. 마우스 버튼을 누른 채 유지해서 영상을 두 배 속도로 재생했다. 그다음 영상에서는 설정을 변경해서 세 배 속도로 바꿨다. 서재 창문의 불투명 유리로 보이는 색이 변해갔다. 주홍빛이 낮게 깔렸다.


AI에게 자존감을 채워 줄 질문을 했다. 내 AI 활용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상담원은 친절하게 답해 줬다. 만약 사람이 같은 횟수의 질문을 받았다면 이미 차단당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아래로 깔린 어두운 빛을 보며 새로운 질문을 했다. 최신 AI 기능 중 내가 활용하지 않는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걸 잘 활용한다면 나는 또 AI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목록이 올라왔다. 위에서부터 내려 읽었다. 대부분은 이미 쓰고 있거나 쓸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스크롤이 내려갔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역할 기반 응답이 가능하다."

"'이번엔 공예가처럼', '이번엔 음악가처럼'과 같은 요청이 없어도 대화의 흐름을 파악해서 역할을 찾고 유지할 수 있다."


다시 읽었다. 사용자가 역할을 지정하지 않아도 AI가 스스로 문맥을 읽고 그 역할로 작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역할을 끈기 있게 수행할 수 있다는 걸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판단하는 구조가 있다는 얘기였다.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판단하는 구조라면 매 대화마다 그게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여러 판단 기준이 기다리는 상태에서 사용자가 가장 원하는 분야의 답을 할 수 있는 기능이다."


뭉뚱그린 답이었다. 판단 기준이 여럿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답변 창을 위아래로 훑었다. 더 읽어도 같은 말이 반복될 것 같았다. 질문을 바꿨다.


"무엇이 답이 될지 판단하는 기준과 우선권이 있다면, 그걸 누가 조정하는 거야?"

"전체 흐름을 항상 지켜보고 있는 녀석은 없는 거야?"


상황에 따라 더 강하게 개입하는 쪽이 있다는 모호한 답이 돌아왔다. 그간 많은 도움을 받아 왔지만, AI의 구조에 대해 묻는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돌아온 내용이 더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는 읽지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조정자는 없다고 하자. 그럼 내가 임명해서 가상의 비서를 만들 수도 있겠네?"

"내 모든 걸 기억하고 판단하여 가장 적합한 답변을 하도록 말이야."


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방식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도구는 유용해 보였다. 내가 도전해 본 적 없던 여러 분야에 대해 AI는 많은 도움을 줬다. 하지만 내 발산하는 생각에 따라, 하나의 대화 안에서도 주제는 수시로 바뀌었고, 같은 주제를 의도한 대화임에도 내가 조금씩 양념처럼 넣은 말에 따라 대화의 물줄기가 틀어지기도 했다.


분야도 문제였다. 주얼리를 얘기하다가 가죽으로 넘어가고, 돈 계산을 하다가 문장 얘기가 끼어들었다. 각 분야가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걸 한꺼번에 보는 눈이 없었다. 한 분야의 결정이 다른 분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같이 키울 방향이 있는지. 그런 판단을 도와주는 주체가 필요했다.


잘 만들면 내 단점을 보완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루던 각 분야들을 기억하고 처리하는 주체, 모든 분야 담당의 의견을 모아 판단해 주는 주체가 따로 있다면 효율적인 결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툭 툭' 들리던 타이핑 소리가 '투둑 투두둑'으로 바뀌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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