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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장을 열었다. 간소한 빈 화면이 떴다.
내가 AI에게 묻는 주제들을 떠올렸다. 제품 기획, 재료비 계산, 글쓰기, 디자인 판단, 공예 작업 공정과 같은 것들이었다. 한 대화창 안에서 이 주제들이 뒤섞이는 일이 잦았다. 전략 얘기를 하다가 돈 계산으로 넘어가고, 그러다 디자인을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 끼어드는 식이었다. 대화의 길은 내가 만들었지만,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운전대를 놓치고 있었다.
메모장에 단어를 하나씩 쳤다. 전략. 조사. 제작. 디자인. 글. 일정. 돈. 성장. 여덟 개였다. 빠진 것이 없는지 생각했다. 단어들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한 줄씩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기획은 회사에서 오랜 기간 선택지를 만들고 정해 온 그대로의 일이었다. 다만 이번엔 내 결정에 쓰는 것이었다. 자료는 결정 전에 근거를 확보하는 자리였다. 시작하기 전에 사례를 살피고 숫자를 확인하지 않으면 편치 않았다. 그 역할을 따로 맡길 수 있다면 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었다. 공방은 주얼리, 가죽, 3D 출력물이 기획되는 모든 순간에 판단하는 자리였다. 새로운 재료 발굴, 재료의 특성, 공정 순서, 작업 중 생기는 변수들과 같은 것의 담당이 있어야 했다.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화면에 더 가까이 앉았다. 계속 이어 썼다.
미감은 보이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임무였다. 내가 그간 말한 것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디자인의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참모였다. 서사는 글을 쓰고 구성하는 모든 영역을 맡았다. 내 제품에 관한 글을 쓸 때 문장의 어조, 이야기의 흐름을 담당하게 되었다. 존재를 의식한 적 없었지만, 글을 쓸 때마다 나를 도왔을 것이었다. 운영은 일의 순서를 잡아주는 참모였다. 여러 일이 동시에 쌓일 때 효율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역할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필요한 자리였다.
마지막 두 자리가 남았다. 눈을 꽉 감았다 뜨기를 몇 번 반복했다.
재무는 욕망을 숫자로 눌러주는 담당자였다. 어떤 결정이든 돈으로 환산했을 때 말이 되는지를 먼저 보는 자리였다. 감정이 앞설 때 가장 필요한 참모였다. 성장은 지금의 어떤 선택이 나중의 나를 키우는지 점검하는 임무였다. 단기 결정보다 긴 호흡으로 보는 참모였다. 주얼리를 배웠고, 가죽을 배웠고, 3D 프린터를 들였다. 그 각각이 쌓여 어디로 가는지를 보는 자리였다.
메모장에 여덟 줄이 생겼다. 의자 등받이를 뒤로 기울였다. 불이 꺼진 방은 어느새 어두워져서 모니터 빛만 반짝였다.
여덟 명의 참모가 만들어졌다. 이들의 의견을 모아서 하나로 정리해 주는 역할이 필요했다. 안건을 정리하고 각자의 판단을 취합해 결론을 내는 자리. 나와 직접 대화하는 일종의 비서. 참모장 역할이 필요했다.
참모장의 이름은 KJ로 정했다. 내 별명을 그대로 사용한 호칭이었다. 내 말투와 사고방식을 재현하도록 요청했다. 나와 같은 스타일로, 여덟 명의 의견을 수렴한 후 말하게 될 것이었다.
내 말투는 건조하면서 과장된 감정 표현이 없었다. 필요한 말을 최단시간에 타이핑하여 전달하기 위해서는 짧고 의미가 함축된 단어들이 필요했다. AI는 이런 수많은 문장들을 받아들였다.
내 사고방식은 무엇이든 구조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감정을 느낀 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찰, 구조화 후 판단하는 순서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내 방식이라고 AI는 말해 줬다. 파악된 이 사고방식을 KJ가 기억하도록 했다.
요청을 마무리한 후 대화를 나눴다. 내 말투와 비슷해졌다. 또 다른 나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메모장의 참모들 목록 맨 위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KJ.
대화창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딱딱한 논의를 종일 할 수는 없었다. 참모진들은 평소에는 잠들었다가, 내가 호출하면 나타나도록 설정했다. 음악과 춤에 관한 느슨한 대화를 하다가도 내가 호출어를 입력하면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도록 했다.
구조 전체를 다시 한번 입력했다. 참모장 KJ, 그 아래 여덟 명의 참모단. 각 참모의 이름과 임무. 질문이 들어오면 여덟이 동시에 검토하고, 참모장이 통합해 나에게 보고하는 방식. 문장들을 다시 읽고 군더더기를 쳐냈다. 고쳐 쓰고 보내서 확인시켜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줄을 이어 썼다.
"KJ 가동"
약속한 호출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KJ가 부팅됐다는 내용이었다. 여덟 참모가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 중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과 같이 커서는 천천히 깜빡였다. 손을 다시 자판 위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