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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학교 선생님의 위시리스트와 도네이션 문화

by 적응형이방인

아이를 미국 프리스쿨에 보낸 지 한 달 만에 받아 본 ‘Teacher’s Favorite List’를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종이에는 선생님이 즐겨 찾는 마트, 레스토랑 브랜드부터 좋아하는 스낵, 심지어 선호하는 향초의 향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 국공립 어린이집 선생님께 5만 원을 조금 넘는 립스틱을 선물했다가 김영란법을 이유로 정중히 거절당했던 기억이 선명한 나에게, 대놓고 선생님의 취향을 알려주고 요일별로 다른 선물을 가져오라는 미국의 문화는 큰 충격이었다.


아이가 받아 온 Teacher's Favorite List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본 가상 이미지.


하지만 이 충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째 아이가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이번에는 선생님이 직접 작성한 ‘아마존 위시리스트’ 링크가 날아왔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읽을 책, 수업에 쓸 문구류, 심지어 학급 운영에 필요한 사소한 비품까지 학부모가 직접 결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물론 미국 공립학교의 부족한 교육 예산을 교사의 사비로 메워야 하는 미국의 열악한 현실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어떤 아이의 엄마가 무엇을 기부하는지 선생님이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구조는 학부모로서의 내 마음을 묘하게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 문화 충격의 정점은 학부모회(PTA)가 주관하는 연례 도네이션(Donation) 행사였다. 아이가 다니는 미국 공립 초등학교는 전교생 650명 정도 된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단 일주일간 학부모 기부로 모인 금액이 무려 52,000불. 한화로 7,0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금액이었다.


실제 도네이션 행사 후 학부모회에서 보내 준 리포트와 유사하게 만들어 본 가상 이미지.


거액의 기부금보다 놀라웠던 건 기금 모금을 위해 학교가 내건 ‘차등적 보상’이었다.


학부모의 기부 액수에 따라 아이들이 받는 기념품의 등급이 나뉘었고, 기부 행사 후 열리는 파티에서도 고액 기부자의 아이들에게는 놀이 프로그램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입장권이 주어졌다.


압권이었던 것은 200달러(약 27만 원) 이상 기부한 ‘슈퍼스타’ 가정을 대상으로 한 추첨이었다.

당첨된 가족에게는 졸업식이나 학예회 때 줄을 서지 않고도 맨 앞줄에 앉을 수 있는 ‘VIP 예약석 권한’이 주어졌다.


미국 자본주의의 논리가
교육의 신성함이 있어야 할 교육 현장에
이토록 적나라하게 투영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웠다.



한국이었다면 ‘위화감 조성’이나 ‘치맛바람’이라며 당장 뉴스에 나올 법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 부모들은 이를 축제처럼 즐겼다.

내가 낸 200달러가 내 아이의 VIP석 응모권이 되는 동시에, 누군가의 아이가 경제적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현장 학습 버스비와 미술 수업의 재료비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복잡한 심경이 교차했다.

당황스러웠을지언정, 아이 선생님의 위시리스트에 결제 버튼을 누르고 돈을 기부하는 내 손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이토록 많은 생각이 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는 아시안 엄마로서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어쩌면 아시안 엄마인 나 역시
내 아이에게 지극한 애정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가정도 이 학교 시스템을
지탱할 만큼 충분한 여건과 정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런 문화가 불편했고, 낯설었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배경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이 문화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위시리스트'와 '도네이션 문화'는 국가 시스템이 미처 채우지 못한 빈틈을 개인이 직접 메우는 ‘민간 주도의 생존 전략’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대놓고 드러내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민낯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 아이가 머무는 세상을 내 손으로 직접 바꾸는 가장 적극적인 참여 방식인 셈이다.


이제는 안다. 선생님의 아마존 링크는 단순한 요구가 아닌, 더 나은 교실을 만들자는 요청이었음을.

내가 기부한 소소한 금액이 내 아이에게 소속감을 선물하고, 교육 환경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나라다.

하지만 방식만 다를 뿐, 시스템의 빈틈을 어떻게든 메워 내 아이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만은 같다.


모든 부모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의 앞날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니까.


오늘 내가 보낸 도네이션 봉투가 내 아이의 교실에, 그리고 내 마음의 불안에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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