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론티어'라 쓰고 '핵심 무급인력'이라 읽는다.

미국 공립학교를 지탱하는 ‘학부모’의 힘

by 적응형이방인

미국에 오기 전, ‘매일 요리하는 엄마’만큼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는 ‘매주 학교로 봉사하러 가는 엄마’였다.


직장인 엄마조차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학교를 돕고 다시 일터로 복귀하는 모습은, 학부모 봉사가 선택이었던 한국인의 시선으론 참 의아한 풍경이었다.


왜 저 엄마들은 귀한 시간을 쪼개
아이 학교로 향할까?


그 의문은 미국 공립초등학교의 현실을 마주하며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학부모 봉사, 즉 발론티어(Volunteer)는 거창한 활동이 아니다. 학교 수업 자료 복사부터 정원 관리, 필드트립 보조까지 학교의 아주 사소한 일과 속에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점심시간 식사 지도(Lunch Monitor)다. 학부모들이 돌아가며 학교를 방문해 아이들의 우유 팩을 따주고, 식탁을 치우며 식사 시간을 돕는다.


그사이 선생님들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온전한 식사를 즐긴다. 교사의 휴식권을 보장하면서도, 학교의 부족한 일손을 학부모들이 ‘시스템’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무급 인력', 학부모

미국 공립학교에서 학부모가 학교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축이 된 이유는 교육 예산의 독특한 구조에 있다.


미국은 지역 주민이 내는 재산세(Property Tax)를 기반으로 학교 예산을 마련한다.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학교의 재정 상황이 극명하게 달라지는 구조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비교적 재정이 풍부한 편에 속하지만, 정작 학교의 살림살이는 늘 빠듯하다. 텍사스주 특유의 예산 재분배 제도인 이른바 '로빈후드 법' 때문이다.

부유한 교육구의 예산 일부를 재정이 부족한 타 지역 학교로 나누어 쓰다 보니, 겉으로 보이는 풍요로움과 달리 학교 내부의 체감 예산은 항상 타이트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인건비‘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미국 학교에는 담임교사 외에도 상담사, 간호사, 보안 요원 등 전문 인력이 매우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들의 급여와 복지 비용을 감당하고 나면, 정작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세세하게 도와줄 보조 인력을 추가로 고용할 여력은 사라진다.


결국 시스템이 메우지 못한 그 빈틈을 채우는 것은 학부모 발론티어다.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학부모가 기꺼이 학교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며 공교육의 질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커뮤니티에 대한 기여를 중시하는 문화

미국인들에게 학교는 단순히 아이를 맡기는 곳이 아니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일부이며, 내 세금이 투입되는 ‘나의 기관’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따라서 아이 학교의 환경 개선을 위해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여긴다.


부모가 교실 뒤편에서 교구를 준비하고 행사를 기획하는 과정은 학교 운영을 직접 확인하고 목소리를 내는 참여의 장이 된다.


실제로 학교에서 마주한 학부모 봉사자들은 교사와 놀라울 정도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학부모회인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 멤버들은 학교 직원 못지않은 프로페셔널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PTA의 존재도 모르던 시절 나는 그들이 학교의 직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이 당당한 참여 문화가 결국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힘이 된다.



이방인 엄마가 매주 학교에 가는 이유

사실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느끼는 엄마이고, 언어에 대한 부담으로 학교에 가는 일은 내게 꽤 부담스러운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도 내가 매주 학교로 향하게 된 시작은 결국 ‘아이’였다. 한국이면 아직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닐 나이에 낯선 미국 초등학교에서 생활을 시작한 아이. 그리고 미국 교육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엄마.


서툰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느라
애쓰는 아이를 보며,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알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생겼다.



처음 도서 바자회(Book Fair) 봉사에 참여했을 때, 미국인 엄마들 사이에서 30분 넘게 입도 뻥긋 못 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여전히 학교에 갈 때마다 긴장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운동화 끈을 조여 매는 이유는 이방인을 보는 그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학부모라는 공통점, 그리고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진심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작은 교점을 만든다. 서툰 영어라도 그 마음은 충분히 전달된다. 아이들이 쓰는 생생한 영어를 귀동냥하는 것은 덤이다.


내가 내는 1시간의 시간이 아이의 세계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고, 동시에 나를 이 마을의 구성원으로 빚어가고 있다는 확신.


이제 나에게 발론티어는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한 작은 몸부림이자 이방인이 공동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중한 발걸음이다.




[TIP] 미국 공립학교가 낯선 한국 학부모를 위한 가이드


1. 사전 발론티어 등록은 필수!

백그라운드 체크(Background Check): 학생 안전을 위해 필수적인 신원조회 절차다. 교육구(ISD) 홈페이지에서 미리 신청해야 하며, 방문 시 반드시 ID(운전면허증, 여권 등)를 지참해야 한다.


등록은 지역 교육구(ISD: Independent School District)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신청한다. 보통 매 학년도마다 갱신하고, 승인까지 보통 수일에서 일주일 정도 소요되므로 학기 초에 미리 등록해 두는 것이 좋다.


2. 지켜야 할 기본 매너

* T.P.O에 맞는 복장: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가벼운 차림보다는 깔끔하고 활동적인 복장을 추천한다.

* 내 아이와의 거리 두기: 봉사 중 내 아이 곁에만 머물거나, 남의 아이 사진을 찍는 것은 금물이다. 학교 방문의 목적이 봉사이기 때문에 아이와 인사는 잠깐만 하고 본인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개인정보 보호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내 아이나 다른 아이들의 사진을 찍는 일에 유의해야 한다.

* 상담은 정식으로: 봉사 현장에서 선생님과 길게 상담하는 것은 실례다. 개인적인 상담은 별도로 요청하자.


3. 미국 공립초 필수 용어

* PTA (Parent Teacher Association): 학부모 교사 연합회. 학교의 각종 행사 기획, 예산 모금, 봉사자 모집을 주도하는 핵심 자치 기구다.

* The Nurse: 학교 보건실. 아이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가며, 보통 "Go to the nurse"라고 표현한다.

* Field Trip / Chaperone (샤프론): 현장 학습(소풍) 시 선생님을 도와 학생들을 인솔하는 학부모 보호자를 뜻한다.

* Specialists (전담 수업): 담임교사가 아닌 미술(Art), 음악(Music), 체육(PE), 도서관(Library), STEM 등을 가르치는 과목별 전문 선생님들을 말한다.

* Dismissal (하교 시스템): 미국 학교는 하교 시 안전을 위해 귀가 방식별로 아이들을 엄격히 구분하여 인계한다. 하교 방법 변경도 별도 양식을 통해 신청해야 당일 하교 방식을 변경할 수 있다.

- Car rider: 부모가 차량 픽업 라인에서 대기하면 아이를 차로 인계하는 방식.

- Bus rider: 지정된 스쿨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방식.

- Walker: 걸어서 귀가하거나 학교 지정 장소에서 부모를 만나 걸어가는 방식.


4. 발론티어 난이도 추천

* 하 (Workroom Helper/Garden Volunteer/Running club Monitor): 교구 제작, 복사, 자료 정리, 학교 정원관리, 러닝클럽 모니터링 등 단순 작업. 신체 노동 위주의 활동으로 영어 소통 부담이 가장 적다.

* 중 (Lunch Monitor / Art Helper/Mystery Reader/Book Fair): 급식실 식사 지도나 미술 수업 보조, 북페어 도서 판매,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역할. 아이 또는 학부모와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수준의 영어실력을 요구한다.

* 상 (Room Parent/Room Mom): 반 전체 행사를 기획하고 학부모들과 소통하는 역할.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이 필요하다.


나도 아직 미국 학교의 발론티어 세계에 입문자 수준이지만, 사실 학교마다 봉사의 종류나 분위기는 제각각이며 영어 실력에도 정해진 기준은 없는 것 같다.


완벽한 문장보다는 아이를 돕겠다는 진심과 가벼운 눈인사가 더 큰 언어가 되기도 한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학교 밖을 맴돌기보다는 우선 부딪혀보며 직접 경험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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