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계관 위로 다시 쌓아 올리는 '다름'의 이해
졸업을 앞두고 이력서를 채우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창 '글로벌 인재'가 화두였던 그때,
나는 자기소개서 한 구석에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이해하는 인재'라는 문구를 당당히 적어 넣었다.
인도 서머캠프, 캐나다 어학연수, 여러 번의 해외여행. 이런 경험들을 나열하며 내가 얼마나 글로벌한 감각을 지닌 사람인지 어필했다.
하지만 진짜 해외에서 살며 진짜 다양성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그때의 호기로움이 종종 부끄러워진다.
"다름을 이해한다"라고 말하던 나의 고백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
이제야 매일 몸소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미국은 거대한 용광로 같다.
외모와 언어는 물론 가치관과 문화까지 정말 각양각색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당혹감으로 찾아온다.
최근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일은,
어제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며 친해졌다고 믿었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버린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못 봤겠지' 싶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마주쳐도 나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아, 이건 못 본 게 아니라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내게 먼저 다가왔던 친구였고, 관계에 진심인 나는 밤잠을 설쳐가며 곱씹었다.
'내가 실수했나?', '서운하게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에 지인들에게 경험을 묻고 해외생활 커뮤니티에도 질문을 올렸다.
그리고 그 답변들 사이에서 내 무릎을 탁 치게 만든 해석이 있었다.
그것 또한 그들의 '문화'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미국인들에게 관계란 철저히 '상황(Context) 중심'일 때가 많다.
'지난주에 커피 마실 때 즐거웠던 사이'가 '언제 어디서든 반갑게 인사해야 하는 사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친밀함'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어느 정도 친해졌더라도 각자의 선(Boundary)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며,
그날의 기분이나 스케줄에 따라 타인에게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무례함'이 아닌 당연한 '권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늘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상대가 오해할까 봐 조심하는 것에 익숙한 내게 꽤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이런 냉정한 깨달음은 일본계 미국인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도 이어졌다.
내가 "이곳 사람들은 나를 크게 판단(Judge) 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라고 말하자,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 친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같은 나라 사람들은 티 나게 너를 판단하지.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조용히' 너를 판단해."
그 말은 꽤나 서늘한 충격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무례함이 없다고 해서 다름이 완전히 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기준들 속에서 나 역시 끊임없이 평가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사회를 경험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상황과 사람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주기적으로 나의 세계관을 무너뜨린다.
내가 알고 믿어온 '기본값'이 이곳에서는 '반대값'이 되기도 하는 세계.
기존의 세계관이 허물어지고 처음부터 다시 세워나가는 과정은 분명 고통스럽고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 낯선 충격들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고 배움이 된다.
나는 오늘도 깨닫는다.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을 오해하지 않고, 그저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지켜나가는 방법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곳에서 성장하며 배워야 할 가장 큰 숙제이자 묘미다.
참으로 알 수 없어 어렵고 재밌는 곳이다, 이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