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마존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천천히, 그리고 계속해서 나의 길을 걸어가는 법에 대하여

by 적응형이방인

미국 아마존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주재원 와이프로 지낸 지 1년.

10년에 가까운 커리어를 뒤로하고 매일 아이들 케어와 집안일에만 집중하던 어느 날이었다.


주재원 와이프가 왜 갑자기 취업 면접이냐고?

배경은 이러했다.


미국에 오고 집 근처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영어 수업을 듣다가, 단순한 영어 공부만으로는 실력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난이도 높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과정을 찾다 눈에 들어온 것이 ‘ITP(Internationally Trained Professionals)’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해외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과정이었다.


코스 과정 중에는 실제 레주메를 만들고 미국 회사에 지원해 보는 실습 과제가 있었다.


한국에서 오래전 적어둔 이력서를 꺼내 몇 줄 덧붙이고, 영어로 바꿔 ‘제출하기’를 눌렀다. 아마존 어세스먼트라고 불리는 온라인 시험을 한 시간 반 정도 치르고 나서는 사실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일이주가 지났을 무렵, 면접 요청이 온 것이다.

한국에서 오래 해 온 PB(Private Brand) 상품개발 업무였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나에겐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가 있었지만, 취업을 시도할 용기도 여건도 없었다.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바쁜 남편과 어린아이 둘을 온전히 혼자 케어해야 하는 낯선 땅에서의 육아. 맞벌이는 커녕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재취업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메일을 보고 황당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국 경력이 전혀 없는 나도 어쩌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줄 알았던 나의 시간들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이력서를 나조차 제대로 복기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리테일 종사자 커리어의 정점이라 불리는 아마존 면접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일단 부딪혀야 했다.


오랫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업무 경험들을 한글로 정리하고, 면접 답변으로 구조화한 뒤 영어로 번역하고, 쉬운 표현으로 다듬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준비 기간 3주 동안 아이들을 케어하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에너지를 면접 준비에 쏟아부었다. 잠을 자다가도 영어로 답변하는 꿈을 꿨고, 무리한 탓인지 림프선이 부어 귀까지 아파왔다.



결과는 어땠냐고? 아쉽게도 탈락이었다.


비즈니스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미국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느꼈다. 상품 개발자는 다양한 부서 및 외부 업체와 끊임없이 협상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의 부족함이 컸다.


사실 한국어로 설명해도 쉽지 않았을 경력직 면접을 영어로, 그것도 빠르게 이어지는 영어 질문 속에서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벽이었다.

특히 아마존 면접은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모든 답변은 그들의 기준에 맞게 구조화되어야 했고, 사소한 숫자와 디테일까지 꼬치꼬치 질문이 이어졌다. 영어 이해와 말하기에 온 에너지를 쏟다 보니 답변의 논리 구조는 무너졌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련했다.


그것 또한 현재 나의 실력이자 모습이니까.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다만, 한국어였다면 훨씬 더 프로답게 표현했을 답변들을 언어의 장벽 때문에 기초적인 수준으로만 내뱉어야 했던 순간들이 아쉬웠다. 지난 일 년간 다져온 생활 영어와 스몰토크는 프로만을 뽑는 면접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잔잔하던 일상에 불쑥 끼어든 아마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나간 이 3주가 내게 남긴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미국에 온 이후 나는 마치 태생부터 엄마이자 아내였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가 쌓아온 시간이 사라진 것 같아 허무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순간들은 생생한 이력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을 궁금해하는 세계적인 회사가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되찾기에 충분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느낀 건, 미국 취업 시장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공채 중심의 한국과 달리, 작은 경험을 쌓아가며 기회를 넓혀가는 구조였다. 작은 역할에서 시작하더라도, 성과에 따라 더 큰 기회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네트워킹의 중요성도 실감했다. ‘Referral(지인 추천)’은 누군가 한 번 검증한 지원자라는 신뢰로 이어졌고,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내 면접 소식에 기꺼이 도움을 먼저 제안해 주었다.


링크드인 같은 플랫폼의 역할도 흥미로웠다. 단순한 구인 사이트가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브랜딩 채널이자 네트워크의 장이었다. 채용 담당자가 프로필을 보고 먼저 제안을 보내는 문화 속에서, 왜 사람들이 그토록 프로필 관리에 공을 들이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해진 양식 없는 레주메, 면접 후 반드시 보내는 ‘Thank you 메일’ 등 낯선 취업 문화를 직접 경험한 것도 값진 자산이 되었다.




무엇보다, 지난 일 년 동안 이곳에서 맺어온 관계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내 발음을 몇 시간씩 교정해 주던 컬리지 친구, 전날 모의 면접을 도와준 이웃집 엄마, 면접 당일 응원을 보내준 사람들까지. 낯선 곳에서 혼자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무색하게,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경험은 내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방향을 보여주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커리어를 되찾아야지’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앞으로 이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


물론 여전히 나는 갈 길을 고민하고 있고, 지금 이곳에서의 가장 큰 우선순위도 변함이 없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족을 지키는 것. 그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내 커리어를 놓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우연히 찾아온 이 기회 덕분에 나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고맙다, 아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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