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혼자 남겨진 기분

해외살이 중 예고 없이 찾아온 마음의 몸살

by 적응형이방인

해외생활을 하면 주기적으로 외로움과 향수가 찾아온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미국 생활 9개월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 몇 달은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아이들 유치원과 학교를 알아보고, 낯선 환경에 적응시키고, 뒤늦게 도착한 이삿짐을 풀며 집을 ‘사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슬퍼할 틈도, 외로울 틈도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즈음,

설명하기 어려운 무기력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은 이유 없이 가라앉았다.


무의식이 먼저 알아챈 걸까.

한국에서의 일상을 꿈꾸다 깨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바쁜 주재원 남편, 오롯이 내 몫이 된 낯선 땅에서의 육아.


이 감정의 정체는 아마도

‘완전히 혼자가 된 육아’에 대한 무게였을 것이다.


남편은 밤낮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했고,

아이들은 낯선 환경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유일한 안식처인 나에게 쏟아냈다.


그런데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힘들 때면

부모님께 잠시 아이들을 맡기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가끔은 남편과 단둘이 외출을 하거나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도 있었다.


여기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특히 미국은 아빠의 육아 참여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학교 행사나 등하교 시간,

아이 손을 잡고 서 있는 아빠들의 모습은

홀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내 현실과 선명하게 대비됐다.


풍요로워 보이는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내 모습은

유난히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 먼 타지에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외로움을 더 깊게 만들었다.


시차 때문에 한국의 지인들과 연락은 쉽지 않았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아직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말은 쌓이는데, 들어줄 사람은 없는 상태.


그 시기 나는 종종,

이 넓은 지구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




어느 날, 둘째 아이가 울며 물었다.


“엄마, 왜 영어만 쓰는 미국에서 살아야 해?

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평소 같았으면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선택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길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내 일을 내려놓고 여기까지 왔는지.


처음으로 깊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멈춰 있었고,

세상은 나 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며칠을 그렇게 보낸 뒤,

큰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낯선 환경 속에서도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어떤 장점을 가진 아이인지가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 작은 아이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겠다.’




그날 이후, 아주 작은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감정을 문장으로 붙잡으며

내 마음을 정리했다.


아이가 아닌, 나를 위한 시간도 만들었다.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고,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커뮤니티 컬리지 수업도 등록했다.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자

멈춰 있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종종 외롭다.

가끔은 여전히, 지구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감정이

내가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오롯이 나 자신과 가족에게만 집중해 보는

이 시간 또한 내게 소중한 시간이란 것.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말한다.


“괜찮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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