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는 커가고, 나는 비워간다.
출산 전, 나는 아기용품을 하나둘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기가 넘어질 때 다치지 않도록 바닥매트를 깔고, 손끝으로 그 표면을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진짜 누군가의 세상을 책임지게 되는구나.” 그 다짐 속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처음엔 엉금엉금 기던 드니가 이제는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다닌다. 바닥매트만으로는 부족해 TV 앞엔 울타리를 세우고, 주방에는 출입을 막는 높은 장벽을 설치했다. 작은 아기 침대는 금세 작아져 제법 큰 침대로 바꿔야했다. 아이 하나를 키운다는 건, 단순히 한 생명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삶의 형태까지 완전히 다시 설계하는 일이었다.
육아의 현실은 언제나 ‘연쇄 반응’이었다. A를 사면 A와 연관된 B, C, D가 자동으로 따라온다. ‘이게 마지막이겠지’ 하면서도 장바구니에는 늘 새로운 무언가가 담겨 있다. 웃기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요즘은 좋은 육아용품이 많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런 도구조차 없던 시절, 우리 부모 세대는 어떻게 아이를 키웠을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의 불편함조차 감사하게 느껴진다.
나는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사려고 노력했다. 필요한 건 중고 거래나 무료 나눔으로 구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새로 샀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인터넷의 깊은 구멍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이건 꼭 필요할 것 같은데?’ ‘이건 있으면 편하겠는데?’ 그렇게 스며든 작은 유혹은 결국 새벽 배송 상자를 불러왔다. 나의 절제력은 육아용품의 귀여움 앞에서 자주 무너졌다.
이제는 현관 앞까지 울타리를 설치했다. 예전엔 바닥을 기던 아이가 이제는 소파를 오르고, 의자를 밟고, 어디든 닿으려 한다. ‘이제 정말 다 샀다’ 싶다가도 또 뭔가 필요해진다. 끝이 없다. 그래서일까. 육아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육아용품을 사는 일도, 아기를 키우는 일도. 결국은 함께 커가는 여정일 뿐이다.
그 와중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아이를 키우면 물건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수용할 공간은 한정돼 있다. 결국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정리해도 정돈되지 않는다. ‘비워야 산다’는 말이 진짜였다. 나 역시 원래 맥시멀리스트였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내 삶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졌다. 서랍 속 깊이 숨겨둔 오래된 물건들을 꺼내 하나씩 버리고 또 버렸다. 내 짐만이 아니라 남편의 물건까지. 언젠가 필요하겠지, 언젠가 쓸 수도 있겠지 하던 물건들은 결국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하루에 하나씩 버리는 걸 목표로 산다. 그렇게 비운 자리에는 드니의 옷과 장난감이 들어섰고, 아이가 자라날 공간이 만들어졌다. 집은 한정된 공간이지만, 마음은 비울수록 넓어진다. 예전엔 수납장을 더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비우는 게 훨씬 현명하다는 걸 안다. 집이 숨을 쉬려면, 그 안의 사람도 숨을 쉬어야 한다.
이젠 버리는 일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비우는 순간이 가장 시원하다. 필요 없는 물건은 적당한 가격에 팔고, 부피가 크거나 급한 건 무료로 이웃에게 나눈다. 물건이 옮겨가는 동안 묘한 해방감이 따라온다. 나눌수록 마음이 가벼워지고, 비울수록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이를 낳고서야 알았다. 사는 법보다 비우는 법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나는 지금 매일 연습 중이다.
오늘도 드니의 울타리 옆을 정리하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어질러진 장난감 사이로 아이의 발자국이 찍혀 있고, 그 흔적이 마치 성장의 기록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게 진짜 성장이지.’ 드니는 점점 커가고, 나는 조금씩 비워가며 커간다. 삶은 그렇게 서로의 속도로 자라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