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가 죄라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는 나름 모범적인? 기독교인이었다. 현실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딜레마에 쳐했을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씀대로(의지하여) 행하자]
이 말에는 성경만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오직 주의 말씀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성경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깔려있다. 대학생활에서 얻은 삐뚤어진(?) 신앙관으로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들을 때도 항상 이러했다.
'왜 성경에 나온 대로 하지 않고, 믿지 않느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성경은 하나님의 의지에 이끌리어 작성된 글이라고 배워왔다. 저자가 있다고 한들 그들은 모두 성령의 이끌림으로 성경을 쓴 것이니 이는 곳 인간이 쓴 것이 아니라 무결하신 하나님이 쓴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성경무오설 즉, 성경에는 오점이 없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말씀으로만 살아라,라고 말했던 이들이 성경을 읽어보았을까?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너무도 모순되는 말들이 넘쳐난다. 전봇대에 붙은 다이어트 전단지만큼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성경에 쓰여있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서 2,4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 - 요엘서 3,9-10
무결한 성경에 쓰여있는 이 모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뿐만 아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은 조울증 환자의 다름 아닐 정도로 평화와 심판의 경계를 넘나 든다. 우리는 그저 내로남불의 정신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66권의 성경은 누군가의 [채택]으로 엮어진 책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쓰였다는 이야기는 따로 다뤄야 할 만큼 방대하기 때문에 크게 언급은 않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성경무오설의 믿음이 기독교를 사랑과 나눔의 종교가 아닌 증오와 배척의 종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소수자를 [심판]하려는 기독교인들은 대표적 근거를 레위기에서 찾는다. 모세 5경 중 하나인 레위기는 율법에 관한 책이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서술되어 있다. 레위기의 율법을 근거로 성소수자를 배척하고 죄인으로 단정한다면 그 사람은 레위기에서 언급하는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만이 저 여자를 쳐라,라고 말했던 예수의 말처럼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한다면 레위기에서 나오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 또한 동성애와 버금가는 죄인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그렇다면 레위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살펴보자.
1장-7장: 피는 먹으면 안 된다. (선짓국 1패)
11장: 부정한 동물을 먹으면 안 된다(돼지, 낙타, 토끼 등) (삼겹살 1패)
12장-15장: 성기에서 나오는 피와 고름은 불결한 것이니 이를 흘리면 속죄 예식을 필히 드려야 한다. (이제 기독교인 여성들은 매월 한 번씩 비둘기를 사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19장: 한 밭에 두 종류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금지(우리 아빠는 장로님이며 농부이신데, 논에다가 벼 이삭과 보리 이삭을 뿌립니다)/ 종류가 다른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을 걸치지 말라(면 60%, 마 40% 혼용)/ 구레나룻은 절대로 자르지 말 것(유대인 사진들 중에 현재에도 구레나룻을 자리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
이 말도 안 되는 율법들은 근본주의 유대교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확실한 것은 대한민국 기독교인들 중 이를 지키는 이는 장담하고 1명도 없을 것이다. 이 외에도 할례(성기의 일부분을 자르는 의식)는 하나님 백성 증명의 아주 중요한 척도 중 하나였지만 현재 할례를 하지 않았다고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성경에 쓰여있는 금지의 명령들은 충성으로 따르면서 왜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고 반복한 이웃사랑의 율법은 모른척할까. 예수야 말로 현실과 사회적 맥락 없이 율법으로만 사람을 속죄하고 판단하는 현실에 가장 분노한 사람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가복음 2장 27절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를 지적하는 율법학자에게)
모두 뱃속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뒤로 나가버리지 않느냐? 그것들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한다." 하시며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 마가복음 7장 18절 ~ 20절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주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 사도행전 15장 10절 (베드로의 발언)- (수제자 베드로도 율법을 지키기 힘들다고 투정 중)
예수가 살았을 당시 예수의 주된 적(?)은 사탄과 악마가 아니라 율법과 규칙에 얽매여 다른 이를 단죄하고 배척하기 앞섰던 율법주의자(바리새인)이었다.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알려진 비유는 천국의 열쇠는 이웃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물으니 예수는 율법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나와있는가, 하고 다시 반문한다. 율법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적혀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래, 그렇게 하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율법학자는 그렇다면 이웃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다시 묻는다 이에 예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한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타민족의 혼혈로 태어난 종족이다. 유대인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피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며 증오하고 배척했다. 지금으로 치면 사마리아인은 기독교인들에게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와 같은 이단 종교와 같을 것이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너희도 이렇게 하라. 율법보다 위에 있는 이웃사랑의 실천은 어떠한 율법보다 항상 위에 있다.
성경이 흠이 없는 완전한 지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 자체적으로 내재한 모순에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성경을 완전한 신의 말씀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고백으로 보면 어떨까? 영원 무한한 신을 뜻을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 신의 뜻을 들으려 애쓰고 실천하려 애썼던 선조들의 이야기가 성경이지 않을까. 그렇게 성경을 받아들인들 구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길이 구원의 길임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곧 구원의 길임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의 길은 결코 교리체계나 제도로서의 기독교 종교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교회의 길이 그리스도의 길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257p.
읽은 것
-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 외 지음, 도서출판사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