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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한 결과

평균의 힘 I

피해의식,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한 결과

“내가 돈이 없어서 보여서 저러는 구나” ‘한주’는 우울해졌다. 백화점과 식장에서 점원들이 자신에게 불친절하고 무관심한 것처럼 느꼈다. 이것이 한주가 우울해졌던 이유였을까? 아니다. 직원들이 자신에게 불친절하고 무관심한 이유가 자신이 돈이 없어서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주는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우울해졌던 것이다. 한주는 어떻게 이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피해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다. 가난 혹은 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그런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거나 혹은 비난하거나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낄 때가 잦다. 그때 이들은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까? 간단하다. 자신이 가난하거나 학벌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피해의식은 왜 발생했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정말 가난한지(학벌이 나쁜지), 가난하다면(학벌이 나쁘다면) 대체 얼마나 가난한 건지(나쁜 건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세상 사람들의 불친절, 비난, 무관심의 원인을 너무도 간단히 자신의 가난 혹은 학벌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욱 분명하다.


 만약 ‘한주’가 자신이 정말 가난한지(학벌이 나쁜지), 가난하다면(학벌이 나쁘다면) 그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비난받을 만큼의 가난(학벌)인지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한주는 세상 사람들의 불친절, 비난, 무관심의 모두 원인을 그리도 간단히 가난(학벌)으로 돌리지 못했을 테다. 세상에는 그 자신보다 가난하지만 불친절, 비난, 무관심을 겪지 않은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타자’의 여집합이다.

 그렇다면 ‘한주’는 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하는 걸까? 이는 역설적이게도 온통 ‘나’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통 ‘나’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을 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한다. 의아하다. ‘나’에 대해서 관심을 쏟으면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삶의 진실을 뒤집어 보는 일이다.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를 통해서다. ‘나’가 아닌 ‘너’를 통해 ‘나’를 알 게 된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타자’의 여집합이다. 즉, ‘나’는 ‘타자’ 아닌 존재다. (여기서 ‘타자’는 특정한 사람이 아닌 ‘나’ 아닌 존재 일반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너’(타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나’의 키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를 통해서이다. ‘나’보다 키 큰 ‘너’ 혹은 ‘나’보다 키 작은 ‘너’ 통해서 ‘나’의 키를 알 수 있다. 그런 ‘너’라는 타자가 없다면 ‘나’의 키를 수치로 잴 수 있는 ‘줄자’라는 ‘타자’라도 있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추운 겨울에 라떼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지칠 때 홀로 있고 싶으며, 슬플 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나’를 언제 알게 되는가? 라떼를 마시고, 홀로 있고,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볼 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지칠 때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슬플 때 신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너’를 알게 되었을 때다. 그때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처럼, ‘나’는 ‘나 아닌 존재’(타자)를 통해서만 확인된다. 무인도에서 태어난 이를 생각해보라. 그는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많이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 무엇도 알 수 없다. 자신의 키가 얼마인지, 성격은 어떤지, 취향은 어떤지,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다.      


자의식 과잉을 벗어나는 법

     

 온통 ‘나’에게만 관심이 쏠려서 ‘너’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자의식 과잉이다. 온통 ‘나’에게만 관심이 쏠려 역설적이게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바로 자의식 과잉이다. 이 자의식 과잉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없게 만듦으로써 피해의식을 촉발한다. 이제 우리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하나의 방법론을 알게 되었다. 

     

 자의식 과잉 상태에서 벗어나면 된다. 즉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다면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너 자신을 알라!” 서양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가 이 당연한 말을 힘주어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극심한 자의식 과잉 상태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가 아닌 ‘너’를 보기 어렵다. 이는 거창한 이론 없이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네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라. ‘너’가 ‘나’에게 피해를 준 일은 많고 크게 기억한다. 하지만 ‘나’가 ‘너’에게 준 피해는 적고 작게 기억한다. 아니 그런 일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누구인가? 상처 받은 ‘나’와 상처 준 ‘나’ 모두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상처 받은 ‘나’와 상처 준 ‘나’를 동등하게 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얼마나 드물던가? 

     

 이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방증한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속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philosophy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지 못한다면, 지혜sophia를 사랑philos하는 일, 즉 철학philosophy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2000년 전에 이미 단언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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