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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f(나의 마음x타자의 목소리)

피해의식과 언론 II

언론이 피해의식을 촉발‧증폭하는 방식


 언론이 피해의식 촉발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방식은 대단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가 만 원 짜리 한 장을 건네주려고 한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반복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도 돈 없잖아. 너도 힘들게 살고 있잖아. 너 돈 없었을 때 누가 도와줬어? 그때 얼마나 비참했는지 까먹은 거야” 이런 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대단히 비범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그래 나도 지금 힘들잖아”) 심지어 추위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기묘한 반감이 생기게 될 수도 있다.(“나는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 데, 너는 뻔뻔하게 구걸해서 돈을 벌다고?”) 이는 특정 언론사가 피해의식을 확대재생산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같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공감과 교감의 동물이다. 그래서 상처 받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자기보존’과 ‘타자공감’이 공존하는 존재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과도하고 반복적으로 부각시킬 때 ‘자기보존’(자신의 고통에 대한 일차적 감수성)이 강화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타자공감’(타자를 향한 공감과 교감 능력)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피해의식은 그렇게 확대 재생산된다.  


    

언론의 본령


 물론 일부 언론사들이 쏟아낸 기사들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요즘 일부 언론사는 종종 ‘거짓’ 기사를 낸다.) 그 모든 기사들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 해 있다. 하지만 언론의 본령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에 있다. ‘사실’(A가 B를 때렸다.)은 ‘진실’(A는 가해자다)이 아니다. ‘사실’은 ‘진실’의 토대가 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실’들(B가 칼을 들고 A를 쫒아왔다. A가 B를 때렸다.)들을 추가, 삭제, 배치하느냐에 따라 ‘진실’(B는 가해자다)이 아닌 ‘거짓’(A는 가해자다)을 구성할 수도 있다.

       

 언론의 참된 역할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리는 데 있다. 언론사는 단지 파편적인 ‘사실’만을 알리는 기관이 아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실’들이 있는가? 참된 언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 없이 많은 ‘사실’들 중 유의미한 ‘사실’을 연결하고 배치해 ‘진실’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그런 측면에서 피해의식을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사는 언론의 본령에 반하는 기관인 셈이다. 

     

 피해의식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부 언론사들의 행태를 보라. 수많은 ‘사실’들 중 특정한 ‘사실’만을 취사선택하여 보도하거나 혹은 그 취사선택된 ‘사실’들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교묘한 방식으로 배치하여 보도한다. 그 사이에 ‘진실’을 드러내기는커녕 명백히 존재하는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이러한 언론사의 폐단은 자본가의 상처와 고통의 ‘사실’만을 주로 보도하는 일부 보수 언론사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로 '거짓'을 구성하는 법


 노동자과 자본가(부자)가 있다. 노동자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부당해고‧인격모독‧과도한 업무…)을 당하는 것처럼, 부자(자본가)들 역시 그런 일(과도한 세금징수‧집값하락‧주가하락…)을 당한다. 그 모든 일은 ‘사실’이다. ‘A 재벌이 세금을 과도하게 냈다’ ‘강남 부동산이 폭락했다’ ‘세계 경기 침체로 주가가 10% 하락했다’ 이런 기사들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어떤 ‘진실’을 알릴 수 있는가? 그런 ‘사실’들의 반복적 나열은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우리네 삶의 ‘진실’은 소수의 자본가의 상처와 고통에 있지 않다. 절대적 다수인 노동자의 상처와 고통에 있다. 그러니 참된 언론이 ‘진실’을 밝히려 한다면, 상처받고 고통 받는 노동자들 겪고 있는 ‘사실’들을 연결하고 배치해야 한다. 삶의 진실은 바로 이런 ‘사실’들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일부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당파적 이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진실’에 관심이 없다. 이것이 언론이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이유다. 피해의식을 증폭해야만 사회적 편 가르기(남성-여성, 노동자-자본가, 신세대-기성세대)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당파적 이해를 손쉽게 취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해의식=f(나의 마음x타자의 목소리)


 피해의식은 ‘나의 마음’과 ‘타자의 목소리’라는 두 변수가 만들어내는 함수다. 이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피해의식=f(나의 마음x타자의 목소리) 즉, ‘나의 마음’이 고요해지면(요동치면) 피해의식은 잠잠해진다.(거세진다.) 하지만 만약 ‘나의 마음’이 고요해지더라도 피해의식을 촉발하는 ‘타자의 목소리’가 커진다면 피해의식은 그만큼 거세질 수밖에 없다. ‘나의 마음’의 요동이 아무리 작아지더라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0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시선이 필요하다. ‘나’의 피해의식을 잘 들여다보는 시선과 우리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증폭하려는 타자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시선. 물론 전자가 선행되어야 후자가 가능하다. ‘나’의 피해의식을 아프게 성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피해의식을 잘 돌보지 못해, ‘나의 마음’이 요동친다면, ‘타자의 목소리’와 상관없이 피해의식은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전자(나의 마음)만큼 후자(타자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의 피해의식을 성찰해서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해지더라도,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증폭하려는 ‘타자’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려는 시선이 없다면 ‘나’의 피해의식은 다시 요동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는 비단 특정 언론사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우리 주변 사람들 중 우리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증폭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들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독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요동치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다. 피해의식은 ‘나’의 마음과 ‘타자’의 목소리라는 두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함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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