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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왜 공부하는가?

1.

“철학을 왜 공부하시나요?” 이는 철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네 삶은 왜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졌을까요? 그것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그저 습관적으로 해왔던 일상 때문입니다. 철학마저 그런 습관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며 나름의 답을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네 가지의 이유로 철학을 공부하곤 합니다. 그 네 가지 이유에 각각 ‘사치재’, ‘도피처’, ‘장난감’, ‘밥’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사치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나 돈 꽤나 있는 이들 중 지적 허영에 휩싸인 이들이 있죠. 이들은 종종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죠. 이들은 왜 어려운 철학을 공부하려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말이야” “라캉은 이렇게 말했지”로 자신의 말을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은 매력적인 학문이죠. 철학은 값비싼 명품보다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두르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명품의 역할을 합니다. 

     

 철학은 값비싼 명품보다 더 비싼(priceless!) 명품이지요. 명품의 진정한 값어치는 희소성에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철학보다 더 값비싼 명품도 없을 겁니다. 흔한 명품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철학은 돈만으로 살 수 없으니까요. 이것이 비싼 사치재를 살 수 없는 이들이나 혹은 주변에 모든 이들이 비싼 사치재를 갖고 있는 이들이 철학을 공부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죠. 이처럼 어떤 이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치재로서 철학을 공부하곤 합니다.

       

 ‘도피처’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삶의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이들이 있죠. 이들 역시 종종 철학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이들 왜 철학을 공부하려는 것일까요? “삶에서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어”라고 말하기 위해서죠.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곤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별하고, 이혼을 하고, 해고를 당하고, 사업이 망할 때가 있죠, 이때 사람들은 철학으로 눈을 돌리곤 합니다. 지금 처해 있는 삶의 곤경을 외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갖고 있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철학은 형이상학적 학문이죠.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은 무엇일까요? 사물들의 특정한 형태形 너머而上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즉, 우리네 일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자연적인) 일physics들 너머meta-에 있으면서, 그 모든 구체적인 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어떤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철학은 그 시작부터 이런 형이상학적(탈레스의 ‘물’, 플라톤의 ‘이데아’)이었습니다.

      

 철학의 이런 독특성 때문에 철학은 종종 도피처로 이용되곤 합니다. 삶이 곤경(이별‧이혼‧해고‧부도)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느닷없이 철학을 공부해서 삶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태도는 건강한 철학적 욕망이 아니죠. 지금 당면한 구체적인 일을 너머로 도피하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닙니다. 삶의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이들에게 형이상학적 철학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요? “나는 지금 내 삶의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야!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장난감’은 어떤 이유일까요? 공부 꽤나 했다는 먹물들이 있죠. 이들은 순수하게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적 탐구심이 있습니다. 이들은 철학을 ‘사치재’로서도, ‘도피처’로서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즉 지적 허영을 충족해 누군가로부터 손쉽게 관심·인정을 받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자신이 처한 삶의 곤경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일까요? 지적 쾌감 때문입니다.

      

 철학은 어떤 학문도 주지 못하는 강렬한 지적 희열과 쾌감을 줍니다. 철학은 일종의 반전反轉 드라마입니다. 철학은 기존의 통념을 뒤엎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로 예를 들어봅시다. 언어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긴 시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언어를 통해 더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지에 대해서 논의해왔습니다. 그때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등장해 이렇게 말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근본적으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요? 모든 사람들이 언어의 사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무용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셈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나요? “사랑해”라는 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가요? 그렇지 않죠. 이는 말하는 사람 혹은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어떤 이에게 “사랑해”는 “지금 출근한다”는 의미(인사말)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지금 섹스하고 싶어”라는 의미(요구)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너도 사랑한다고 말해”라는 의미(강요)일 수도 있죠.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언어로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낸 셈이죠. 이는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철학자들은 모두 기존의 드라마(통념)를 뒤집는 반전을 이뤄낸 이들입니다. 그뿐일까요? 철학은 반전 드라마인 동시에 아름다운 축조물입니다. 철학은 하나의 세계(체계)를 보여줍니다. 철학은 단순히 끝에 가서 내용만 뒤집는 흔한 반전 드라마와 다릅니다. 철학의 반전이 놀라운 진짜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말로 자신의 저서(논리-철학논고)를 끝맺으며 20세기 언어철학의 최고의 반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반전이 정말 놀라운 이유는 단순히 통념을 뒤집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통념을 뒤집기 위해 빈틈없이 구성된 철학의 논리체계 때문입니다. 철학의 논리체계는 빈틈없이 구성되었기에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어느 유럽의 도시처럼 말입니다.

      

 철학은 하나의 정신적 세계를 구성하는 일입니다. 헤겔은 헤겔의 정신적 세계를, 니체는 니체의 정신적 세계를, 푸코는 푸코의 정신적 세계를 구성했죠. 철학은 하나의 세계관이며, 동시에 기존의 세계관을 넘어서는 세계관인 셈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구성해 이전의 세계(통념)를 뒤집어 내는 철학은 놀랍고도 흥미진진합니다. 지적 탐구심이 있는 이들에게 철학보다 강렬한 지적 희열과 쾌감을 주는 대상도 없을 겁니다. 이것이 먹물들이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2.

 그렇다면 ‘밥’은 무엇일까요? ‘밥’으로서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밥은 생존의 조건입니다. 살기 위해 밥을 먹듯, 살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낯설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철학은 현학적인 학문이어서 우리네 일상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실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철학의 대표적인 오해죠. 철학은 우리네 일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학문입니다. 어쩌면 철학은 우리네 일상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철학은 삶을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너의 (직장‧장사‧여행‧연애…)철학은 무엇이냐?’ 흔히 하는 말이지요? 이는 학문으로서 철학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네 삶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지요. 우리는 철학이 삶을 구성하는 방식임을 이미 알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철학은 우리네 삶 그 자체입니다. 물론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삶은 이어집니다. 하지만 철학이 없다면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게’ 됩니다. ‘삶을 구성하는 방식’을 아는 이만 능동적으로 살 수 있고, 그 방식을 모르는 이는 삶에 휩쓸리게 되니까요.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은 다르지요. 스스로 삶을 구성해나가지 못하고 세상에 휩쓸릴 때 우리는 정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 사이에는 ‘삶’과 ‘죽음’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는 것 아닐까요? 이처럼, 어떤 이들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살게 해주는 것일까요? 지혜입니다. 철학을 공부해서 얻게 되는 지혜,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일까요? ‘앎’과 ‘삶’을 연결해내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한(지혜를 얻기 위한) 두 가지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삶’으로 ‘앎’에 이르는 길과 ‘앎’으로 ‘삶’에 이르는 길입니다. 철학 책 한 권 읽은 적 없지만, 자신의 ‘삶’을 수행하듯 정직하고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이 어떠한 ‘앎’에 이르게 되어서 지혜로워지기도 합니다.(장인→철학자) 반대로 도서관에서 파묻혀 어려운 철학 책을 읽으며 ‘앎’에 이른 사람이 그 ‘앎’에 합당한 ‘삶’에 이르게 되어 지혜로워지기도 합니다.(학자→철학자)       


 지혜를 위해 철학을 공부하려는 이는 역설적이게도 철학을 공부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삶’으로 ‘앎’으로 연결해낼 수 있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일 겁니다. (선가의 스님들이 이런 경우일 겁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가 ‘앎’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삶’으로 ‘앎’에 도달하기 어려운 시대를 삽니다. 우리네 일상적 ‘삶’이 어떠한가요? 먹고 사느라 정신없는 삶 아니던가요? 그 삶에 치여 그저 때우듯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네 ‘삶’의 맨얼굴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앎’에 도달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살지만(삶) 제대로 알지(앎)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삶에 치여 지혜로부터 멀어져갑니다. 그래서 ‘앎’이 중요한 겁니다. ‘삶’으로 ‘앎’을 구축하기가 어렵기에, ‘앎’으로 ‘삶’을 구축해야 합니다. 제대로 공부해서 명료한 ‘앎’에 이르면 자연스레 그에 걸맞는 ‘삶’에 이를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이론으로서, 지식으로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일 겁니다.


 말하자면, ‘앎’으로서의 철학은 때우듯 쫓기듯 흘러가는 기존의 ‘삶’을 잠시 멈춰 세워 다른 ‘삶’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시작점인 셈입니다. 척박한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삶’이 아니라 ‘앎’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난해한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네 삶을 바꾸어 냅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철학을 공부하기! 이것은 척박한 삶 위에서 지혜로워지기 위한 꽤 훌륭한 방법일 겁니다.


 ‘사치재’, ‘도피처’, ‘장난감’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일을 부정하거나 폄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철학을 공부해도 좋습니다. 잘난 척하기 위해,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지적 쾌감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역시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려는 그 모든 동력들이 끝내는 ‘밥’으로서의 철학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 모든 일이 지혜에 이르는 과정에 이르는 과정일 수 있으니까요.


 고백컨대, 저의 철학적 여정이 그랬습니다.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철학을 공부해서 사십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대기업 직장인이었을 때 잘난 척하려고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을 때, 제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먹물이 되어갈 때 즈음 지적 쾌감을 쫓아 철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들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앎’과 ‘삶’을 연결해내는 지혜를 위한 철학에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에서 철학을 공부하려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공부의 이유가 끝내는 ‘나’와 ‘너’와 ‘우리’ 모두를 더 기쁘게 하는 따뜻한 ‘밥(지혜!)’ 한공기로서의 철학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가 중요할 겁니다. 저는 철학자로서 그것이 철학의 본령이라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철학을 하며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시 그렇게 철학을 공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지혜sophia를 사랑philo했던 철학philosophy자,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로 짧은 이야기를 가름할까 합니다.         


 우리는 철학을 하는 체 하면 안 되며, 실제로 철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기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건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쾌락』 에피쿠로스          


-성남시 철학모임 <테스형> 수업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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