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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자격

Q)

학교폭력과 교권침해를 일삼는 학생들에 대한 분노가 크게 듭니다. 이것이 선생으로서 정당한 분노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A)

‘가르침’과 ‘선생’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정확히는 가르칠 자격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요? 너무 당연하게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가르칠 자격’은 무엇일까요? 보수적인 이들은 '지식(역량)'이라고 답하고, 진보적인 이들은 '애정(마음)'이라고 답하곤 합니다. '지식'과 '애정'이 가르칠 자격이 될 수 있을까요?


 10여년 전 즈음, 철학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던 시기에 유독 학생들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크고 작은 언쟁은 물론이고, 원색적으로 다투기도 했고, 당장 교실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던 적도 더러 있었습니다. 저는 왜 그랬던 것일까요? 학생들이 무례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백컨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제게 있었습니다.


 저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지식과 애정이 없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가르칠 지식(철학)을 충분히 공부한 후에 가르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게 철학을 배우러 오는 이들에게 애정을 품지 않고 가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학생들과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던 걸까요? 제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르칠 자격’은 (가르칠 것에 대한) 지식도 (학생들에 대한) 애정도 아닙니다. 고요한 마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불안, 걱정, 공포, 시기, 질투, 애정결핍, 피해의식 같은 마음은 언제라도 우리네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지요. 그 마음들을 잘 살펴서 고요하게 만들 수 없다면 좋은 선생은 되기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학생들과 마찰이 있었던 것은 그네들의 잘못이었다기보다, 제 안에 정돈되지 못한 불안, 공포, 시기, 질투, 애정결핍, 피해의식으로 인해 요동치는 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요동친다면 지식도 애정도 없는 것만 못한 것이 되지요. 마음이 요동칠 때, 명료한 지식은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혼란함이 되어버리고, 따뜻한 애정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편애(편을 가르는 애정)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배움보다 상처를 더 크게 주는 선생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지 못했던 이들입니다. 고요한 마음에 이른 이들에게 지식과 애정이 더해질 때 더 적은 상처로 더 많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됩니다.


 지금 선생님께 펼쳐진 상황이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두렵기도 하겠지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겠지요? 아이들의 처벌이 과한 것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 향한 선생님의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 역시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선생님은 그저 월급 받는 직원이 될지 아니면 진정한 스승이 될지를 가름하는 시간에 있다는 사실을요. 지금 요동치는 마음을 잘 다스려 고요해질 수 있다면, 진정으로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지금은 폭풍 같은 시간 속이니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이 시간은 그저 흘러가게 보낸 다음, 선생님의 마음을 잘 살펴주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안에 요동치는 마음들(불안·공포·시기·질투·애정결핍·피해의식)은 없는지 잘 살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들을 고요하게 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 선생님이 제게 물으신 고민에 스스로 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상대도 상황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것은 내 마음이 요동치기에 혼탁해서 그런 것이니까요. 자신의 마음이 고요해졌다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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