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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수행

<창조적 진화>를 끝내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삶을 더 잘살려고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더 잘사는 것은 철학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수행修行’이 필요합니다. '수행'이 무엇인가요? 익숙한 행동行 다시 닦아서修 새로운 행동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공부’뿐만 아니라 ‘수행’ 역시 필요합니다. 익숙한 행동을 다시 닦아 새로운 행동을 만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한다고 한들 그 모든 것들은 모두 공염불이 되니까요.      


 이것이 평범한 이들과 심지어 많은 공부를 한 지식인들마저 더 나은 삶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일 겁니다.  전자는 공부와 수행 모두를 하지 않고, 후자는 공부는 하되 수행은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부보다 수행이 더 어렵다는 겁니다. 공부는 슬픔(지루함·난해함)뿐만 아니라 기쁨(지적 쾌락)역시 있지만, 수행은 정말 고행이라 부를 만큼 고통 뿐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많은 이들이 공부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쉬운 방법으로 더 귀한 것을 얻으려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니까요.    

  

 더 나은 삶을 바라며 철학을 가르치는 제겐 어려운 소망과 불가능할지 모르는 소망이 있습니다. 공부와 수행을 일치시켜보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되며, ‘수행’하는 것 자체 ‘공부’가 되는 철학 수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품은 어려운 소망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수행이 그저 고행苦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행苦行과 낙행樂行의 배치로 전환해보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불가피하게 고될 수밖에 없는 수행을 즐겁게 만들어보고 싶은 소망. 그것이 제가 품은 불가능할지 모르는 소망입니다.   

    

 저와 함께 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수행’을 하고 계신 겁니다. 한 권의 철학책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지친 몸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매일 같은 장소에 와서 어렵고 힘든 철학을 공부를 하셨지요? 그것은 그 자체로 ‘수행’입니다. 익숙한 행동行을 다시 닦아서 修 새로운 행동을 만드는 힘든 과정이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저는 철학을 함께 공부하며 그것 자체를 수행과 일치시켜보려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고된 수행의 과정을 통해 분명 더 나은 삶을 한 걸음을 더 나아가셨을 겁니다.    

  

 나머지 하나의 바람은 제 몫으로 남을 겁니다. 우리가 함께했던 ‘수행’은 분명 고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고됨만 있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 고됨 사이에 즐거움 역시 곳곳에 꽃피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수행이 즐거운 수행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제 나름으로 우리의 수행이 고행 뿐만 아니라 낙행이 되도록 애를 썼습니다. 물론 아직 저의 역량이 부족해 고행苦行과 낙행樂行의 배치로서의 수행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해보이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수행 때는 우리의 수행이 '공부=수행'으로 더 잘 일치 될 수 있도록, '고행-낙행'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애를 쓰겠습니다. 함께 수행해서 즐거웠습니다. ‘공부=수행’ 그리고 ‘고행-낙행’의 배치로서의 수행은 계속됩니다. 더 나은 삶이 더 아름다운 삶이 될 때까지. 수행자들이여, 인연이 닿는다면 다음 수행 때에 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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