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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왜 선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를 때렸을까?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미웠다.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친절했던 친구라도,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싫어지곤 했다. 나의 마음은 왜 그리 뒤틀어졌던 걸까? 이유는 간명하다. 내가 공부를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이유 없이 미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일까? 아니다. ‘공부 못하는 나’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으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무엇일까?  

   

“30등 밑으로 다 나와.”

“너 같이 공부 못하는 새끼는 사람 구실도 못해.”     


 학창 시절, 공부를 못하면 맞아야 했다. 선생(부모)들은 성적이 낮은 아이들을 물리적으로 때리거나 인격적으로 모욕했다. 이는 당시 선생(부모)들이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공부 못하는 나’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 사이에는 선생(부모)들이 야기한 의도적인 상처가 있었다. 선생(부모)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칭찬‧인정‧관심을 주었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때리거나 모욕을 주었다. 이 의도적인 상처가 매개체가 될 때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은 촉발되고 강화된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과도한 칭찬‧인정‧관심을 주지 않고,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때리거나 모욕을 주지 않았다면, 공부를 못하는 것이 마음이 뒤틀릴 만큼의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 이는 달리 말해, 선생(부모)들은 아이들의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방치한 셈이다. 선생(부모)들은 왜 그랬던 걸까? 아이들에게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해주기 위해서? 그런 선의를 갖고 있던 이들도 없진 않았을 테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즉, 명문대학 입학 인원으로 학교(가정)의 평판이 결정되는 당시 교육 체제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다.  


    

피해의식은 권력자의 체제 유지 수단이다

    

 피해의식은 권력자의 체제 강화‧유지 수단으로 기능한다. 달리 말해, 권력자들은 의도적 상처를 통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한다. 이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악착같이 돈을 벌고 싶었다.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심지어 타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했다.     


 나의 마음은 왜 그리 뒤틀어졌던 것일까? 가난했기 때문일까? 그저 가난했기 때문에 돈벌레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자(정부‧자본가)의 의도적인 상처가 이미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곧바로 돈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려면, 권력자의 의도적인 상처(매개체)가 개입되어야 한다.      


 나는 왜 돈벌레가 되었을까? 특정 정부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복지 정책을 무력화시키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하고(정규직 축소‧비정규직 확대 정책), 집값(부동산)을 폭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의도적 상처(무한경쟁‧각자도생) 때문에 나는 돈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가난해서 상처받았던 기억에, 이런 의도적 상처까지 더해질 때 어찌 돈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란 공포 앞에서 돈벌레가 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본이 유발하는 피해의식

 그뿐인가? 자본가(권력자)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피해의식을 조장한다. 자본가는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의도적 상처를 준다. 넘쳐나는 광고들을 보라. 비싸고 새로운 상품(집‧자동차‧옷‧스마트폰…)을 소비하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가? 이는 분명한 의도적 상처다. 돈 많은 이들의 행복을 볼 때, 돈 없는 자신의 불행은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우리의 뼛속 깊이 하나의 목소리를 각인시켜 놓는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고, 돈이 없으면 불행할 것이다.” 이는 명백한 의도적 상처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불러온다. “돈 많은 이들은 모두 행복한데, 돈이 없는 나만 불행하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 드라마, CF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은 필연적이다. 이 피해의식은 가난한 이든 부유한 이든, 누구든 피해갈 수 없다. 가난함과 부유함은 결국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선생‧정부‧자본가…)들은 우리의 피해의식을 방치하거나 조장, 강화하며 기존의 체제를 공고히 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주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불쾌함을 느끼고 모종의 불만을 토로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바로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나만 혹은 우리만 취업이 안 되고 있어!”)이 팽배해 있다. 그들의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근거 없는 반감은, 취업이 잘 되지 않아 받았던 상처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 때문에 발생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의 능력 부족이나 게으름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더 싼 노동력을 찾아 더 큰 이윤을 남기려는 자본가의 탐욕과 그것을 은근히 방치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정부 당국의 정책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이 이주 노동자들 대한 근거 없는 분노와 적대감의 원인이다. 결국 자본가와 특정 정부가 젊은이들의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을 방치‧조장‧강화한 셈이다.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피해의식은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갖가지 의도적(사회적) 상처를 통해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 강화한다. 이는 공동체를 슬픔에 빠뜨린다. 선생이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할 때 아이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할 나위 없이 슬픔에 휩싸인 공동체가 된다.  

    

 공부를 못해서 물리적‧정서적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그 자체로 슬픔(자기비하‧분노‧경멸)에 빠지게 된다. 그뿐인가? 그런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시기‧질투하고 미워하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고 기쁜 것이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이유 없이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슬프다(억울함‧적개심). 그뿐인가? 자신 역시 언제 성적이 떨어져 선생에게 맞거나 비난받을지 몰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아이들의 공동체는 잿빛으로 물든 슬픔의 공동체가 된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정부와 자본가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 강화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필연적으로 슬픔의 공동체가 된다. 가난한 이들은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며 돈을 버느라 슬픔에 빠진다. 또 주변의 동료들을 모두 경쟁자로 여기느라, 동시에 부유한 이들을 시기‧질투하느라 슬픔에 빠진다. 부유한 이들이라고 기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근거 없는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슬픔(분노‧적개심)에 빠진다. 그뿐인가? 자신 역시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 때문에 슬픔에 빠진다.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의 불만과 분노가 향해야 할 대상은 이주 노동자도, 동료 취준생도, 함께 일해야 할 노동자도 아니다.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그 탐욕을 방치하고 부추기는 정부다. 서글프게도, 피해의식에 빠져 있기에 그 삶의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 권력자가 던져주는 그럴듯한 먹이를 물어뜯기에 바쁘다. “요즘 적게 받고 일할 사람들 많아.” “네가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권력자의 이런 의도적 상처에 이주 노동자와 동료 취준생, 동료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 의식은 사라지고 서로를 시기‧질투하느라 상호파괴적인 공동체가 된다.   

   

 피해의식은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들의 공동체를 슬픔의 공동체로 몰아가는 거대한 감옥.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일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고민해보아야 한다. 개인적 상처에 의한 피해의식이 ‘나’와 ‘너’를 슬픔으로 몰아간다면, 사회적 상처에 의한 피해의식은 ‘우리’를 슬픔으로 몰아간다. 개인적 차원의 피해의식을 성찰하며 치유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만큼, 사회적 차원의 피해의식 역시 성찰하며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피해의식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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