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인 상처 VS 의도적인 상처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가? 상처(피해)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발적(비의도적) 상처’와 ‘의도적 상처’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미진’과 ‘혜선’은 둘 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둘은 외모 때문에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해 종종 과도하게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그런데 둘의 피해의식은 조금 다르다. 둘이 받은 상처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진’의 피해의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미진’은 ‘광수’를 오랜 시간 좋아했다. ‘미진’은 긴 시간 고민하다 ‘광수’에게 고백을 했다. “나 오래전부터 너 좋아했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광수’는 ‘경은’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경은’은 누가 봐도 예쁘게 생긴 친구였기에, ‘미진’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상처가 ‘미진’의 피해의식의 시작점이었다. 이 상처는 ‘우발적(비의도적)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광수’는 ‘미진’에게 상처 줄 의도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 마음이 우발적으로 ‘미진’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뿐이다.
‘혜선’의 피해의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혜선’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여자는 일단 얼굴이 예쁘고 봐야 돼.” “너는 그렇게 엉덩이가 펑퍼짐해가지고 어쩌려고 그러냐?” ‘혜선’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혜선’은 어린 시절부터 암묵적인 혹은 노골적인 아버지의 외모 평가 속에서 자랐다. 이 상처가 ‘혜선’의 피해의식의 시작점이었다. 이 상처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아버지는 ‘혜선’에게 상처 줄 의도가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지 모르나 습관보다 무서운 의도는 없다. 아버지의 습관적인(의도적인!) 입버릇은 ‘혜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다
피해의식은 개인 탓인가? 사회 탓인가?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문제(잘못)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잘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은 언제 개인적인 문제가 되고, 언제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가? 피해의식을 유발한 상처가 ‘우발적 상처’라면 그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문제다. 반면 피해의식을 유발한 상처가 ‘의도적 상처’라면 그 피해의식은 사회적인 문제다.
다시 ‘미진’과 ‘혜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진’의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문제(잘못)에 가깝다. 왜 그런가? ‘미진’이 받은 상처는 우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발성은 해석의 문제다. 즉, 우발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한 개인의 해석에 달려 있다. ‘미진’의 고백을 받은 ‘광수’는 ‘경은’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분명 상처다. ‘미진’은 이 상처를 외모의 문제로 해석했다. 이것이 ‘미진’이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긴 이유다.
하지만 ‘미진’은 모른다. ‘광수’가 ‘경은’을 좋아했던 이유는 외모 때문이 아니라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는 섬세한 감수성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미진’이 상처받았던(고백이 거절당했던) 이유는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거칠고 투박한 감수성 때문이었던 셈이다. 이는 ‘미진’이 자신의 상처(고백의 거절)가 외모 때문이 아니라 감수성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면 그녀의 피해의식은 없거나 덜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발적 상처’에 의한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문제(해석)에 가깝다.
하지만 ‘혜선’의 경우는 다르다. ‘혜선’의 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잘못)에 가깝다. ‘혜선’이 받은 상처는 다분히 의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외모로 여성을 대상화(평가)하는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혜선’은 아버지의 이런 ‘의도적 상처’ 속에서 자랐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혜선’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로 표상되는 가부장적 혹은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도적 상처’에 의한 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에 가깝다.
의도성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 분명하고 강력한 의도에는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물론 강력한 의도에 불구하고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여자는 일단은 얼굴이 예쁘고 봐야 돼.” “너는 그렇게 엉덩이가 펑퍼짐해가지고 어쩌려고 그러냐?” 이런 분명하고 강력한 ‘의도적 상처’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아빠가 다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일 거야.” 이런 해석은 정신승리다. 삶을 더 큰 불행으로 빠뜨리는 정신승리. ‘의도적 상처’를 개인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결국 더 짙은 피해의식을 불러오게 된다.
우발적인 상처는 의도적인 상처 속에 있다
피해의식을 다룰 때, ‘우발적 상처’만큼 ‘의도적 상처’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우발적 상처’는 이미 ‘의도적 상처’ 아래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발적이라고 믿는 일들은 이미 특정한 의도 아래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민구’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친구들이 가난한 ‘민구’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이 상처는 분명 우발적이다. 친구들은 딱히 의도를 가지고 ‘민구’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비싼 옷과 가방을 갖고 있는 부잣집 친구에게 관심이 쏠려 ‘민구’에게는 무관심했던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우발적(비의도적인) 상처’는 정말 우발적(비의도적)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이 우발성은 특정한 의도성 아래에서 작동한다. 어떤 의도성인가? 자본주의적 의도성이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감성을 의도한다. 그 감성은 무엇인가? 비싸고 새로운 것은 매혹적이고, 싸고 오래된 것은 비루하다고 느끼는 감성이다. 이는 그 자체로 의도적인 상처다. 자본주의는 비싸고 새로운 것을 구매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의도적인 상처를 준다. 그들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비루한 존재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의도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민구’의 친구들의 무관심은 우발적이다. 그들은 ‘민구’에게 특별히 상처 줄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 우발적인 상처는 이미 자본주의적 의도성 아래서 조직되었다. 자본주의가 만든 의도성(“비싼 것은 매력적이고, 싼 것은 후진 거야!”)이 부잣집 친구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민구’는 무관심 속에서 상처받았다. 그러니 ‘민구’가 받은 ‘우발적 상처’는 이미 자본주의가 유발한 ‘의도적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피해의식 역시 그렇지 않은가. 학벌(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회사에서 자신보다 학벌(외모)이 좋은 후배가 항상 주목받고 심지어 먼저 승진까지 했다고 해보자. 이때 학벌(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는 그 후배가 좋은 학벌(외모) 때문에 자신보다 인정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후배가 주목받고 빨리 승진한 것은 학벌(외모)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업무 성과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학벌(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가 받은 상처는 우발적인 것일까? 즉, 그 피해의식은 개인의 탓인가?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그 우발적인 상처에 사회적인 문제(학벌중심주의 혹은 외모중심주의)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학벌(외모) 때문에 받은 상처는 우발적(개인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우발성은 학벌중심주의(외모중심주의)적 사회가 야기한 의도적인 상처 아래서 발생한 우발성일 수 있다.
이처럼 피해의식을 유발하는 상처가 개인적인(우발적인) 상처라 할지라도, 그 속에 이미 사회적인(의도적인)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피해의식은 ‘우발적 상처’에 의한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 우발적인 상처에는 이미 특정한 사회적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룰 때,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 역시 면밀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