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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은 냉소주의를 낳는다 I

냉소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냉소주의란 무엇인가?     


“얼굴 반반한 것들은 다 그런 거 아니야?”
“대기업이 다 저런 식이지, 뭐.”     


 피해의식은 냉소주의를 낳는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우리네 삶을 파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냉소주의가 무엇인가? 냉소주의에 대해 깊이 성찰한 독일의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에게 직접 들어보자.      


냉소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다그들은 늘 만사의 궁극적인 귀착점인 무를 보기 때문이다그동안 심리적 장치는 충분히 유연해져 생존 요소로서 자신의 활동에 대한 영구적 회의를 자기 내면에 설치했다냉소적 이성 비판』 페터 슬로터다이크     


 간명하게 말하자. 냉소주의는 구경꾼의 세계관이다. 즉, 어떤 일에도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세상만사를 구경꾼의 태도로 빈정대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런 냉소주의는 왜 발생하는 걸까? 무지함 때문일까? 아니다. 냉소주의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구보다 똑똑한 이들이다. 무지한 이들이 영원할 것을 본다면, 냉소주의자들은 세상을 정확히 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늘 만사의 궁극적인 귀착점인 무無”를 보는 냉소주의자들은 세상을 정확히는 파악하고 있다.     


 

‘헛똑똑이’들의 마음, 냉소주의

    

 슬로터다이크의 말은 어렵지 않다. ‘결국 다 없어질 것들인데 그 문제에 대해 내가 뭐 하러 피곤하게 개입해야 해?’ 이것이 냉소주의자들의 태도다. 냉소주의자들은 마치 모든 것을 깨달은 도인이나 된 것처럼 “충분히 유연”하다. 하지만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유지하고 싶은 “생존 요소”일 뿐이다. 즉, 그들의 유연함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영구적 회의를 자기 내면에 설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냉소주의자는 분명 똑똑하지만 이는 ‘헛똑똑’이다. 냉소주의적 태도만큼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몰아가는 것도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영구적 회의”를 자기 내면에 설치한 이들이 어떻게 기쁜 삶에 이를 수 있겠는가? ‘회의懷疑’는 충분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하고 있는 상태다. 쉽게 말해, “영구적 회의”는 “영원히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으로 기쁜 삶은 애초에 요원하다. 

   

 어떤 일에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삶에 기쁨은 없다. 냉소주의자는 결국 자신의 삶에 구경꾼이 되어 슬픔뿐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구경꾼의 삶은 안전하고 안락하다. 하지만 이 안전과 안락은 결국 공허와 무기력이 되어 삶을 슬픔으로 몰아간다. 물론 구경꾼의 태도로 빈정댈 때 느껴지는 기쁨(조롱)은 있겠지만, 그 기쁨은 곧 더 큰 슬픔으로 전락할 자기 파괴적인 기쁨일 뿐이다. 이런 냉소주의적 태도는 ‘헛똑똑이’들의 마음일 뿐이다.      


냉소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이런 냉소주의는 어디서 오는가? 바로 피해의식이다. ‘선주’는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그녀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이들에 대한 깊은 반감이 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이들의 악행과 실수를 발견할 때마다 ‘선주’는 말한다. “얼굴 반반한 것들은 다 그런 거 아니야?” 이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온 냉소주의다. ‘선주’는 바보가 아니다. 다만 충분히 유연해져서 영구적 회의를 자기 내면에 설치했을 뿐이다. 이런 냉소주의에 빠진 ‘선주’의 삶은 필연적으로 더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      


 ‘선주’가 헛똑똑이 아니라 진짜 똑똑하다면 기쁜 삶에 이르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려고 애쓰면 된다. 다이어트를 하든, 화장을 하든, 성형수술을 하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려고 애를 쓰면 된다. 그때 조금 더 기쁜 삶을 살 수 있다.     

 

 둘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면 된다. 책을 읽든, 여행을 하든, 수행을 하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쓰면 된다.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되면 외모에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어 조금 더 기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을 바꾸려고 애를 쓰면 된다. 이 사회적 시선이 바뀐다면, ‘선주’는 조금 덜 슬프고 조금 더 기쁜 삶을 살 수 있을 테다. 이처럼 자신의 삶의 문제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하면 조금 더 기쁜 삶을 살 수 있다.      


 만약 이 세 가지 방법을 듣고 불쾌해지거나 코웃음을 치고 있다면 자신이 냉소주의자는 아닌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냉소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고, 동시에 그 마음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주’ 역시 그렇다. ‘선주’는 아름다운 외모도, 아름다운 마음도 가지려고 하지 않고, 그런 태도를 당연한 것이라 정당화한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인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데, ‘선주’가 사회적 노력을 할 리는 만무하다. ‘선주’는 그저 헛똑똑이 구경꾼처럼, 세상만사에 빈정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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