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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해악, 관계의 단절

백수라는 피해의식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
“지금 나 백수라고 무시하는 거야?”     


 회사를 그만두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몇 년을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그 방황의 시간이 내게 남긴 상처가 있다. 바로 피해의식이다. 누군가 나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무책임한 가장이라고 비난할까 봐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과도하게 나를 방어하려고 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짙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몇 년째 놀고 있는 내가 마음이 쓰였는지 한 친구가 연락을 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즐겁게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 모든 대화가 나의 피해의식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친구는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려고 자리를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 나는 부지불식간에 차가운 표정으로 친구를 쏘아붙였다. “지금 나 백수라고 무시하는 거야?” 친구는 당황한 듯 아무 말도 없었고, 그렇게 끊어져버렸던 대화처럼, 우리의 관계 역시 서서히 끊어져버렸다.


 그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했던 일은 왜 일어났을까? 그 친구의 따뜻한 미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그 친구의 따뜻한 미소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다. 나는 그 미소를 보았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그날의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그 미소를 기억했기에 찾아든 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그 친구의 미소를 보고도 보지 못했던 건, 나의 지독한 피해의식이 그 미소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피해의식의 해악, 대화의 단절

     

 피해의식은 삶에 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화의 단절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과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 이들은 안다. 그들과는 속 깊은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자신의 피해의식만 볼 뿐, 상대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과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상대를 보지 않는 이와 대화를 이어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피해의식은 대화를 단절시킨다. 

     

“그렇게 힘들면 팀장한테 할 말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네가 군대를 안 다녀와서 그래.”

     

 ‘기태’는 팀장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이 쌓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태’의 동료는 팀장에게 할 말은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태’는 느닷없이 화를 내며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기태’는 왜 그랬을까? 동료의 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기태’는 동료의 마음을 보지 못했을까? 그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기태’는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자신이 특정한 위계나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는 마음이 모두 군대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기태’가 위계나 권력자 앞에 위축될 때면 모두 군대 탓을 하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유다. ‘기태’는 자신의 피해의식을 보느라, 자신을 걱정해주는 동료의 마음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기태’가 동료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이유였다. 

     


‘상상’ 속에서는 대화할 수 없다

     

 피해의식은 대화를 단절시킨다. 피해의식은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억’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의 피해의식이 바로 그랬다. 직장을 그만두고 철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며 지냈다. ‘사실’적으로 돌아보면, 특정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곤 그런 내 삶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난했던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직장 안 다니는 쓸모없는 놈.” “돈도 못 버는 무능한 인간.” “애가 둘인 가장이 저따위로 사냐?” 이런 비난들은 대체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 바로 나의 ‘상상’ 속이었다. 피해의식은 왜곡‧조작‧편집된 ‘상상의 기억’에 의해 발생한다.    

  

 ‘기태’ 역시 마찬가지다. ‘기태’는 군대에서 권력자에 의해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그것은 ‘사실의 기억’이다. 하지만 직장은 군대가 아니다. 물론 직장에도 권력자(팀장‧사장)는 있지만, 그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군대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태’는 직장을 다닌 적이 없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 그는 늘 군대라는 ‘상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태’는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동료들보다 자신이 더 억압받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기태’의 피해의식은 (직장을 군대라고) 왜곡‧조작‧편집한 ‘상상의 기억’에 의해 발생한 셈이다.

        

 대화는 현실에서만 이루어진다. 누군가 꿈을 꾸고 있거나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 자신의 상상(꿈‧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대화의 맥락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대화를 할 수 없는 이유다. ‘상상의 기억’으로 쌓아올린 피해의식을 가진 이는 어떤 대상과도 공감하고 교감할 수 없기에 대화는 불가능하다. 


     

대화의 단절, 관계의 단절

     

 피해의식은 우리네 삶을 파괴한다. ‘대화의 단절’은 바로 ‘관계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활고가 아니었다. 바로 고립감으로 인한 외로움이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혼자 있어야만 했다. 그 고립감과 외로움이 나의 백수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다. 그 모든 일은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바로 나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피해의식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항상 과도하게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은 항상 나를 비난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친구의 미소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을까? 나의 상상 속에서는 이 놈도 저 놈도 모두 나를 백수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세상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피해의식으로 인한 맥락도 근거도 없는 분노와 적개심, 반감으로 대화가 단절되어버리기 일쑤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기태’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기태’가 어디에 있든 계속 상상 속 군대에만 머문다면, 그의 분노와 적개심, 반감은 커져만 갈 테다. 그렇게 ‘기태’ 역시 나의 과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테다.      


 우리네 삶은 언제 파괴되는가? 해고를 당했을 때인가? 사업이 망했을 때인가? 이혼을 했을 때인가? 이별을 했을 때인가? 아니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게 되었을 때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삶은 파괴된다.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해 있든 진심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네 삶은 파괴되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대화의 단절’과 ‘관계의 단절’을 야기한다. ‘관계의 단절’은 곧 ‘삶의 단절’이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이 우리네 삶을 파괴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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