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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의 전이

희생은 피해의식을 낳는다

“왜 나 혼자만 애를 봐야 하는데.”     


 ‘희정’은 육아 문제로 남편과 자주 다툰다.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만 희생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희정’의 남편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나름대로 육아에 신경을 쓰고 있다. 직장에서 일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고, 가급적 회식이나 모임은 참석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아이를 보느라 지쳤을 ‘희정’을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정’은 그런 남편의 마음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엄마이기 때문에 혼자 희생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 ‘희정’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부모’라는 피해의식.      


 ‘부모’ 피해의식은 여느 피해의식과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어떤 피해의식이든, 그것은 희생과 관련되어 있다. 즉, 과도하게 희생하면(희생했다고 믿으면)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돈이 없다(계급이 낮다‧못생겼다‧학벌이 낮다)는 이유로 갖가지 희생을 했다면, 돈(군대‧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라는 피해의식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정말 고된 일이다. 자신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의 질서를 완전히 재배치해야 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당연했던 여유로운 아침, 차분한 저녁, 자유로운 주말은 언감생심이다. 그뿐인가? 아이의 양육을 위해 직장을 옮기거나 그만두거나 혹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다.  


    

‘부모’라는 피해의식

     

 피해의식이 희생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부모’ 피해의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만약 누군가 ‘그렇다’고 쉽게 답한다면, 그 사람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피해의식은 희생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희생이 지나친 슬픔을 주기 때문이다. 즉, 피해의식은 어떤 삶의 조건 아래서 기쁨보다 슬픔이 클 때(크다고 믿을 때) 발생한다. 돈‧군대‧외모‧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라. 그 피해의식은 모두 특정한 삶의 조건 아래서 기쁨보다 슬픔이 컸기(컸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한 마음이다.      


 여기에 ‘부모’ 피해의식의 독특한 점이 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분명 큰 슬픔을 유발하는 희생이 뒤따른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이들은 안다. 아이의 맑은 미소 한 번, 꺄르르 웃음 한 번, 고사리 같은 손이 움직이는 모습 한 번, 새근거리며 자는 모습 한번, 걸음마를 하는 모습 한 번으로 슬픔을 유발하는 큰 ‘희생’은 순식간에 엄청난 기쁨을 주는 ‘헌신’으로 전복된다는 사실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느 피해의식과 ‘부모’ 피해의식이 다른 지점이다. ‘부모’ 피해의식은 여느 피해의식보다 드물고, 설사 그것이 피해의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밀도는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슬픔을 압도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의문이 든다. ‘희정’은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있고, 그것도 아주 고밀도의 피해의식이다. 이런 일은 왜 생겼을까?     


피해의식의 내적 전이


 피해의식의 특성이 있다. 피해의식은 쉽게 전이轉移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의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이는 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고, 어떤 이는 외모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고, 어떤 이는 학벌‧명예‧직장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종류의 피해의식만을 갖고 살아갈까? 즉, 돈(외모‧학벌‧명예‧직장…)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은 그 피해의식만을 갖고 살아갈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피해의식은 쉽게 다른 종류의 피해의식으로 옮겨 간다. 

     

 ‘인선’은 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사회에서 받은 불이익을 모두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탓이라고 믿는다. 그녀의 피해의식은 학벌에만 머무를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곧 돈‧외모에 관한 피해의식에도 휩싸였다. 그녀는 학벌뿐만 아니라 돈과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하나의 피해의식은 또 다른 종류의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된다.      



피해의식이 전이되는 이유, 무의식과 상상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그것은 피해의식이 ‘무의식’적이며 ‘상상’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의 피해의식이 또 다른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되는 이유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피해의식은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질서하고 비약적이며 혼란스럽다. 합리‧논리‧이성(의식)적으로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종류의 피해의식(학벌-돈-외모)들이 한 사람의 무의식 안에서 서로 뒤엉켜 쉽게 전이된다.      


 ‘인선’의 피해의식이 그렇다. ‘인선’의 학벌에 관한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그녀도 ‘의식’적으로는 안다. 그녀가 학벌 때문에 상처받은 적은 있어도, 외모나 돈 때문에 상처받은 기억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는 ‘의식’적인 일일 뿐이다. ‘인선’의 피해의식(과도한 자기방어)은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인선’에게 중요한 것은 학벌이 아니라 피해의식 그 자체다. ‘인선’은 ‘무의식’적으로 온통 자신을 방어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인선’은 어느 영역(돈‧외모‧직장‧결혼…)에서든 과도한 자기방어를 하려는 마음이 쉽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기에 쉽게 전이가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다른 종류의 피해의식 사이에 전이가 쉽게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피해의식은 ‘상상’적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하지만 이 기억은 ‘사실’의 기억이기보다 ‘상상’의 기억이다. 상상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학벌)의 피해의식은 너무 쉽게 다른(돈‧외모) 피해의식으로 전이될 수 있는 이유다.    

  

 ‘인선’의 피해의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인선’의 피해의식은 ‘상상’적이다. ‘인선’은 학벌 때문에 상처받은 ‘사실’이 있지만, ‘인선’의 피해의식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이 더해진 결과다. ‘인선’의 피해의식의 강도는 그 더해진 상상만큼이다. 상상은 한계가 없다.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학벌 때문에 자신을 무시할 것이란 상상은, 돈‧외모 때문에 자신을 무시할 것이란 상상으로 얼마든지 번져갈 수 있다. 이것이 ‘인선’의 피해의식이 다른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된 이유다. 학벌 때문에 상처받은 상상이, 돈‧외모 때문에 상처받은 상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상상’적이기에 쉽게 전이가 이루어진다.   


    

‘부모’라는 피해의식이 생긴 이유


 이제 우리는 ‘희정’의 피해의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부모라는 피해의식은 사실 좀처럼 생기기 어려운 마음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여느 관계에서라면 슬픔인 일(희생)이 오히려 큰 기쁨을 주는 일(헌신)이 되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정’은 왜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희정’의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다. ‘희정’은 가난해서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다.     

 

 ‘희정’의 이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인 ‘상상’으로 인해 점점 더 비대해졌다. 이것이 ‘희정’에게 ‘부모’ 피해의식이 생긴 이유다. 가난이라는 피해의식이 비대해져 부모라는 피해의식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돈이 없어서 희생당했다는 그 ‘무의식’적이고 ‘상상’적 마음이, 아이의 맑은 미소와 웃음을 가려버렸던 셈이다. 이는 비단 ‘희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애새끼만 없었으면 이놈의 직장 벌써 때려치웠을 텐데!” 밥벌이가 힘들 때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부모들이 한둘이던가? 이들 역시 ‘부모’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부모’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미처 치유하지 못한 돈‧학벌‧외모‧장남‧명예 등등의 피해의식이 ‘부모’라는 피해의식으로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사랑의 상실이다.

     

 하나의 피해의식이 비대해지면 반드시 다른 피해의식으로 전이된다. 주변을 돌아보라. 과도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결코 하나의 피해의식만을 갖고 있지 않다. 여러 종류가 뒤엉킨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피해의식은 얼마나 유해한가? 그 유해함은 하나의 피해의식이 다른 피해의식으로 쉽게 전이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유해함이 있다.      


 사랑의 상실이다. 지독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갖가지 피해의식이 중첩되어 비대해진 피해의식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심지어 자신에게 누구도 줄 수 없는 크고 깊은 기쁨을 주는 이마저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희정’의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피해의식에 빠져, 누구보다 자신에게 큰 기쁨을 줄 아이마저 사랑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아이조차 사랑할 수 없는 ‘희정’은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의 수많은 ‘희정’은 알고 있을까? 피해의식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간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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