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주의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한다
냉소주의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냉소주의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그들(냉소주의자)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어차피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냉소적 이성 비판』 페터 슬로터다이크
냉소주의는 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공동체를 파괴한다. ‘찬수’는 대기업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대기업 협력 업체에서 부당하고 부조리한 대우를 받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언론에서 대기업의 횡포나 잘못을 볼 때마다 냉소적으로 말한다. “대기업이 다 저런 식이지, 뭐.” 그런 ‘찬수’가 작은 가게를 열었다. ‘찬수’는 알바생들에게 근무 시간보다 일찍 오고 퇴근 시간보다 늦게 가기를 요구하는 등 크고 작은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들을 지시했다.
‘찬수’는 바보가 아니다. ‘찬수’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자신이 대기업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알바생들에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찬수’에게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없다. 왜 그런가? “상황 논리(‘창업 초반은 힘드니까 어쩔 수 없어’)나 자기 보존(‘일단 나부터 살아야지’)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냉소주의에 빠진 ‘찬수’는 자신이 그렇게 알바생들을 착취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어차피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냉소주의는 과도한 자기정당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크고 작은 방식으로 공동체를 파괴한다. 이런 일상의 모습들은 역사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의 논리가 바로 이것 아닌가? 나치에 부역하며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던 ‘아이히만’의 논리가 바로 이것 아닌가? 그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으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했다. 또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누군가는 그 일을 했을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이렇게 냉소주의는 한 공동체를 파괴한다.
‘찬수’, 친일파, 아이히만의 냉소주의는 어디서 왔을까? 피해의식이다. 찬수는 왜 알바생들을 착취했겠는가? 친일파는 왜 친일을 했겠는가?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 상처 때문에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왜 나치에 부역하여 유대인을 학살했겠는가?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의 기억으로 자신을 과도하게 방어하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다섯 형제들 중 자신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이후 들어간 기술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파괴하는 냉소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는 그 자체로 피해의식이다
냉소주의는 현대화된 불행한 의식이다. 『냉소적 이성 비판』 페터 슬로터다이크
슬로터다이크는 기존의 냉소주의와는 다른,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현대화된 불행한 의식”, 즉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는 어떤 것일까?
새로이 통합된 냉소주의는 자신이 희생자이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이해심을 보인다. 그는 근면하게 동참하는 담담한 겉모습 속에 상처받기 쉬운 불행, 눈물을 쏟고 싶은 욕망을 잔뜩 지니고 있다. 『냉소적 이성 비판』 페터 슬로터다이크
슬로터타이크는 “새로이 통합된 냉소주의는 자신이 희생자이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이해심을 보이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또한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면서 “상처받기 쉬운 불행, 눈물을 쏟고 싶은 욕망을 잔뜩 지니고 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런 마음이 무엇인가? 바로 피해의식 아닌가? 피해의식에 휩싸인 ‘선주’와 ‘찬수’를 생각해보라. 이들은 늘 자신이 희생자이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과도하게 이해하고,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상처받기 쉬운 불행을 날조하여 눈물을 쏟고 싶은 욕망을 잔뜩 지니고 있다.
“새로이 통합된 냉소주의”, 즉 “현대화된 불행한 의식”은 바로 피해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기존의 냉소주의가 피해의식의 부산물이었다면, 새로이 통합된 냉소주의는 그 자체가 이미 피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냉소주의와 피해의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피해의식에 대해 깊이 성찰해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