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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봄날에도 찾아온다.

소중한 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시골 어느 작은 고등학교로 수업을 하러 갔었습니다.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을 안은 채로 학교에 도착했지요. 조금 일찍 도착해서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운동장에서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뛰노는 아이들을 보았고, 뒤뜰에서는 함께 라면을 먹으면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암병동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이들을 보다가, 새싹처럼 피어나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순간, 기묘한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 현기증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새싹’ 사이에서 느낀 어지럼증이었습니다. '죽음'의 냄새가 드리운 곳과 '새싹'의 싱그러움이 드리운 곳의 차이. 현기증이 잔잔해질 즈음,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먹먹한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죽음’과 ‘새싹’ 사이의 그 숭고함과 찬란함이 온 마음으로 전해져 먹먹한 기쁨이 온 마음에 차올랐습니다.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죽음은 봄날에도 찾아오는구나. 그래서 죽음과 새싹은 늘 함께 하고 있구나. 어느 병원에서 한 사람이 죽어갈 때, 어느 학교에서는 한 아이가 새싹처럼 피어나고 있구나. 삶은 이토록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날의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끝과 시작은 함께 한다.’ ‘무엇인가 끝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지겹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지겨운 말의 의미를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끝과 시작의 동시성을 머리로만 이해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는 그것에서 슬픔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둘 모두 끝과 시작의 동시성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사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끝’과 ‘시작’, ‘죽음’과 ‘새싹’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습니다. '죽음'과 '새싹'이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시리도록 아름다운 일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차가운 머리’도 ‘서러운 눈물’도 아닌, ‘차분한 미소’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봄날에도 찾아오는구나.” ‘너’의 끝과 ‘나’의 끝에서 미소 지으며, 또 다른 ‘너’의 시작과 또 다른 ‘나’의 시작을 웃으며 반겨주려 합니다.    

  

 모든 것은 끝나지만,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됩니다. 유독 차가웠던 한해 역시 그렇게 끝내고,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낯설었던 차가웠던 시간들을 끝내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시간을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죽음’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새싹’ 앞에 경박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 합니다. ‘죽음’과 ‘새싹’ 사이에 서서 미소 지으려 합니다. 그렇게 저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Bonne an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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