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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 부쳐

“억울함을 견디는 만큼 위대해진다.”

“억울함을 견디는 만큼 위대해진다.”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늘 그랬듯이 이 계절은 온갖 파열음들이 쏟아지는 계절이다. 저마다 억울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우리’를 대변하기 위해 권력을 쥐려고 한다고 하는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치인도 사람이니 저마다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닌 걸까? 그렇지 않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너무 쉽게 대의를 저버리는 이들은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없다. 


 왜 그런가? ‘우리’네 삶을 돌아보라. 크고 작은 억울한 일을 겪지 않은 이들이 있던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우리’ 모두는 억울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억울함에도 우리는 그저 또 참으며 일상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시민인 ‘우리’의 삶이다. 정치인들은 그런 ‘우리’를 대변하겠다는 이들 아닌가?   

  

 대변代辯은 무엇인가? 대신代하여 말한다辯는 것 아닌가? 대신하여 말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공감이다. 즉, 누군가의 고통과 애환에 대해 절절하게 공감하는 이들만이 진정으로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 암환자의 아픔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이는 암환자이다. 상대의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변한다는 것은 그리도 무거운 일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대의를 저버리는 이들은 정치인으로서 실격이다. 그들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애환을 느끼지 않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함은 소시민의 몫일 뿐, 그것이 위대한 자신의 몫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억울함만을 보는 이가 어찌 ‘우리’의 억울함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자신의 억울함에 도취된 이가 어찌 ‘우리’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저 자신을 위해 권력을 쥐고 싶을 뿐, 애초에 ‘우리’를 대변할 생각이 없는 이들이다. 

     

 감히 정치인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억울합니까? 억울해할 필요 없습니다. 다들 그 정도 억울함은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억울합니까? 억울할 필요 없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당신이 진정으로 ‘우리’를 대변할 준비하는 것이니까요. 억울함을 견디는 만큼 위대해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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