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랑을 안다고 자신이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저 하나의 사랑이 끝났으니 조금 쉬었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이별들 역시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이별의 고통은 전혀 다른 층위의 고통이었다. 이전 이별들의 고통은 홀로 남겨진 외로움, 공허함, 회한과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이별의 고통은 전혀 달랐다.
늘 톨비를 까먹는 나를 위해 차 안에 지폐와 동전을 채워둔 작은 상자, 겨울 외투 안에 몰래 넣어둔 애틋한 쪽지, 내가 의미 없이 보낸 문자들을 가득 채운 작은 노트. 이별 뒤의 일상 곳곳에서 그녀가 나를 얼마나 아껴주었는지에 대한 확인이 계속되었다. 그 수많은 확인들은 내가 그녀를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 그녀에게 얼마나 해준 것이 없었는지를 집요하게 반복해서 확인시켜주었다.
미안함, 자책, 후회에 가슴 안쪽부터 저며오는 뜨거움은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로 번져갔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뜨거움이 찾아올 때면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내려칠 뿐이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고통과 그 고통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알 길 없는 시간 속에서 그저 계속 가슴을 내려칠 뿐이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알았다. 나는 이제껏 사랑을 몰랐으며, 그것이 나의 ‘첫사랑’이었음을.
그 뒤로 더욱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속에 열병 같았던 몇 번의 ‘첫사랑’이 더 지나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랑의 의미도, 이별의 고통의 의미도. 사랑은 ‘내’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일이다. 이 자명한 사랑의 의미가 이별의 고통의 의미를 알려준다. ‘첫사랑’ 이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홀로 남겨진 외로움, 공허함, 행복했던 기억의 회한은 철저히 ‘나’의 문제이니까. 그것은 그저 ‘나’의 고통이기에 사랑이 아니다.
‘첫사랑’ 역시 사랑이 아니다. ‘너’를 소중히 대하지 못했던 미안함, 그로 인한 지독한 자책과 후회는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던가? 그렇다고 믿었던 것은 단지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사랑이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 역시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미안했고, 그것은 ‘내’ 책임이고, ‘내’가 후회하고 있는 고통이다. ‘첫사랑’이 떠나갈 때의 고통 역시 ‘너’의 고통이 아니라 ‘나’의 고통이기에 그것 역시 사랑이 아니다. '첫사랑'은 사랑 바로 앞의 사랑이다.
몇 번의 ‘첫사랑’이 지나고 나서야 사랑의 의미도, 이별의 고통에 대처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사랑은 ‘내’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했다면, 이별의 고통을 대처하는 법 역시 알게 된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너’가 바랐던 것을 하는 것. 많은 ‘첫사랑’을 떠나보냈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고통에 대처하는 법을 안다.
‘너’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하는 것. 지독히도 ‘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삶을 ‘너’의 중심으로 바꾸는 것. ‘너’가 지금 ‘내’ 곁에 없더라도, 아니 없기 때문에 ‘너’가 바랐던 삶을 살아내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다시 사랑하려는 나는 앞으로도 또 미안하고 자책하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통에 취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고통의 취함은 결국 ‘너’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니까.
가슴을 쿵쿵 내려치는 일을 멈추었다. 대신 스스로 차 안에 지폐와 동전을 채워두었고, 스스로 겨울 외투 안에 쪽지를 넣어 두었고, 의미 없이 보낸 문자들을 일기장에 기록해두었다. 그녀는 내 곁에 없지만, 아니 없기에 그녀가 바랐던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나의 외로움, 공허함, 회한도, 나를 위한 미안함도, 자책도, 후회도 모두 지독한 자기애일 뿐이다. 내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그녀였기에 나의 고통은 잠시 내려놓고,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들을 해나가고 싶었다.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다면, 그런 이가 떠났다면, ‘나’의 고통에 심취해서는 안 된다. ‘너’가 원했던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다시 ‘너’를 사랑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다시 ‘내’가 살 수 있다. 지금 ‘나’는 ‘너’의 작은 상자에 지폐와 동전을 채워주고, ‘너’의 겨울 외투에 쪽지를 넣어주고, ‘너’의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가득 채운 노트를 써나가고 있다. 첫사랑 너머, 이별의 고통 너머.
- 사랑 바로 앞의 사랑에 서있는 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