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상이 두려운가?
어린 아이나 젊은이의 특성은 “나는… 나는… 나는…”이라고 하는데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의 표지와 영원한 사람의 헌사는, 이 ‘나’가 ‘그대’나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욕구다. 『사랑의 역사』 쇠렌 키에르케고르
누구에게나 세상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대처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그 두려움을 의연히 극복하며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지요. 반면 어떤 이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늘 위축되고 주눅든 채로 살아갑니다. 이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처럼, 세상과 벽을 쌓고 방안에만 머무는 이들이 대표적인 경우일 겁니다.
그런데 이는 이런 ‘히키코모리’ 같은 유형만의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분노에 차 있는 이들, 세상을 향해 늘 냉소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세상의 두려움에 압도된 이들입니다. 그들의 분노와 냉소는 세상의 두려움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뒤틀어진 자기보호의 마음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상이 두려운 것일까요? 바로 타자들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 세상은 그런 타자들이 도처에 드글거리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얼마나 두려운 곳일까요? 마치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동물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어느 오지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과 비슷할 테지요. 이제 세상의 두려움에 잘 대처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에 대해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의 차이입니다.
사람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은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더 많은 타자를 더 크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더 적은 타자를 더 작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를 이해하는 역량의 차이에 따라, 세상은 더 두렵거나 덜 두려운 곳이 될 겁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부터 출현하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타자를 이해하는 역량을 작게 만드는 것일까요?
바로 ‘자의식 과잉’입니다. 자의식 과잉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모든 일의 중심을 ‘나’로 두는 상태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상대 역시 생각하고 느낄 거라고 무의식중에 확신하는 상태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자의식 과잉’의 결과입니다.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이들은 타자를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이는 끝내 세상의 두려움으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좋든 싫든 세상은 수없이 많은 타자들로 이루어진 세계니까요.
자의식 과잉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일까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나는… 나는… ”이라고 하느라, 이 ‘나’가 ‘그대’나 ‘당신’이 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나는…”을 말하는 이들이 어떻게 타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언제나 세상 모든 일에 중심을 자신을 두느라 점점 더 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나)의 자리에 타자(너)를 세워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자의식 과잉’은 하나의 오해의 소지를 갖고 있습니다. ‘자의식 과잉’은 흔히, ‘이기심’과 혼돈되곤 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의 중심을 ‘나’로 두는 상태는 ‘자의식 과잉’ 뿐만 아니라 ‘이기심’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자의식 과잉’과 ‘이기심’은 명백히 다른 마음 상태입니다. 이 두 마음의 차이를 통해 자의식 과잉이 어떤 상태인지 더욱 분명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렬히 좋아하게 된 가수가 생긴 아이를 생각해보죠. 이 아이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열정적으로 그 가수에 관한 이야기만을 늘어놓게 될 겁니다. 이는 그 아이가 타인의 관심사는 무시하며 자신의 관심사만 이야기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가수를 좋아하는 마음에 온통 도취되어 타인 역시 자신처럼 생각하고 느낄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확신하기 때문일 겁니다.
즉, ‘이기심’이 타인을 의식적으로 자신과 ‘차별화’하는 마음이라면(의도적 무시), ‘자의식 과잉’은 타인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비의도적 무시). 이런 자의식 과잉 상태는 좀처럼 해소되기 어렵습니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자의식 과잉 상태에 균열이 가는 사건(타자)을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타자)에도 불구하고 자의식 과잉 상태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의식 과잉의 균열이 모종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어느 가수를 열렬히 좋아하게 된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아이는 여느 때와 상관없이 신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나, 그 가수한테 관심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요? 당황스럽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화가 나는 마음이 엄습할 겁니다. 이처럼, 타자의 등장으로 자의식 과잉 상태에 균열이 발생할 때 필연적으로 모종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마치 은밀한 자신만의 방에 허락도 없이 누군가 불쑥 침범한 것 같은 기분일 겁니다.
이제 그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당황, 수치, 분노의 마음을 회피하고자 그 친구와 점점 거리를 두게 될 겁니다. 자의식 과잉 상태에 균열이 날 때 엄습하게 되는 불편‧불쾌한 마음(당황‧민망‧수치심·분노…)을 회피하고자 할 때 자의식 과잉은 점점 더 견고해지게 마련입니다. 그 견고함만큼 타자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이것이 한 사람이 세상의 두려움에 잠식당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비단 어느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교, 직장, 사업, 결혼 등등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타자(선배‧상사‧사장‧고객‧시댁…)에게 노출됩니다. 그때마다 누구나 자의식 과잉의 균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타인들 역시 생각하고 느낄 거라 무의식적 확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되지요. 그때 느낄 수밖에 없는 불편‧불쾌함(당황‧민망함‧부끄러움·분노…)을 긴 시간 외면하려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은 간명합니다. 자의식 과잉의 해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의식 과잉의 해소는 자의식 과잉이 균열 나는 순간 찾아오는 불편함‧불쾌함(당황‧민망‧수치심…)을 어떻게 응시할 것이며, 또 그것을 얼마나 견뎌낼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응시와 견딤의 시간 속에서 자의식 과잉은 점점 더 옅어질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더 많은 타자를 더 크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타자가 초래하는 그 불편‧불쾌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것을 묵묵히 견뎌내려는 이들은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미숙한 이는 언제나 “나는… 나는… 나는… ”이라고 하고, 성숙한 이는 “그대는… 그대는… 그대는…”이라고 합니다. 자의식 과잉의 해소는 중요합니다. 자의식 과잉을 해소한다는 말은 성숙해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이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죠. 성숙한 이들은 자의식 과잉을 해소했기에, 그들에게 세상의 타자들이 두려운 회피의 대상이기보다 즐거운 모험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자의식 과잉을 넘어 저마다의 성숙에 이르러 타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신나게 모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실은 자신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랑의 역사』 쇠렌 키에르케고르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고 싶은가요? 매혹적인 이를 사랑하세요. 그때 우리는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온 마음을 사로잡은 이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 매혹적인 이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너’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너’가 ‘나’를 떠나버리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이도 자의식 과잉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매혹적인 이를 간절히 사랑하려 할 때, “내가 감자탕을 좋아하니 너도 감자탕을 좋아하겠지.”라며 쉽게 확신해버릴 수 있을까요? 그런 확신(자의식 과잉)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을 때, 정확히는 별 관심이 없을 때만 가능하죠.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 역시 ‘나’를 좋아해주기를, ‘내’가 ‘너’를 떠날 수 없는 것처럼 ‘너’ 역시 ‘나’를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앞에서 자의식 과잉은 ‘균열’이 아니라 ‘소멸’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자의식 과잉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이도 자신보다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항상 자신 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 주위에 있는 이들 중 누구든 떠나도 상관없다고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니까요.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가 있다면, 결코 자의식 과잉 상태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 빠진 이는 언제나 자신의 중심을 버리고 상대를 중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상대를 조금 더 오래 내 곁에 머물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해본 이들이 성숙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해본 이들만이 “‘나’가 ‘그대’나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의식 과잉을 벗어난 만큼이 바로 성숙의 깊이입니다. 깊이 사랑해서 그만큼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고 그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