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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 스피노자

유쾌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하고, 슬픔의 정서는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한다그러나 다음에 주의해야 한다즉 인간의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자극을 많이 받을 때 쾌감과 고통이 인간에게 관계하지만인간의 모든 부분이 자극 받을 때는 유쾌함과 우울함이 인간에게 관계한다에티카 B. 스피노자 


    

 우울해본 적이 있나요? 우울. 어느 순간 불쑥 찾아와 우리네 삶을 멈추는 불청객입니다. “일은 해서 뭐하겠어.” “밥은 먹어서 뭐하겠어.” 어떤 일을 해도 내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지고 않고, 무슨 일도 다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우울한 마음은 일상을 이어갈 동력을 점점 갉아먹습니다. 별 탈 없이 유지되던 일상은 우울이 찾아오면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가벼운 우울감이든 혹은 그것이 지속되어 발생한 우울증이든 그것은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합니다. 이런 비유가 왜 생겼는지 압니다. 우울증은 크게 두 가지 증상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무기력’과 ‘심각함’입니다. 우울해지면 무기력해지지요. 그 무기력이 만성화될 때, 별일 아닌 일들을 과도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꽃도 지는데 살아서 뭐하겠어" 한 번도 우울해보지 않는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것이 우울의 ‘무기력’이 만성화될 때 촉발되는 ‘심각함’의 정서입니다.      

 우울이 촉발하는 ‘무기력’이 일상을 이어갈 동력을 잠식한다면, 우울이 촉발하는 ‘심각함’은 삶 자체를 잠식합니다. 우울증이 심해졌을 때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누군가에는 지극히 사소한 일조차 자신에게 과도하게 심각하게 여겨질 때 자신이 점점 더 궁지에 몰린 기분에 휩싸이게 되니까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로 비유하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인 ‘심각함’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우울증은 감기처럼 흔하고 곧 지나갈 일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태도가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오히려 우울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우울한 마음이 찾아왔을 때, ‘무기력’에서 ‘심각함’으로 너무 쉽게 전이되도록 방치하는 것 아닐까요?


 우울증은 감기가 아닙니다. 감기는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 치유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울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우울증은 자연적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우울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우울해지는 경우가 더욱 일반적입니다. 작은 우울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너무 크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겁니다. 우울한 마음은 가장 먼저 '삶의 동력'을 앗아가고, 그 다음 '삶의 의미'를 앗아가고, 그 다음 '삶 자체'를 앗아갈 수도 있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울한 마음을 끊어내고 유쾌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먼저 ‘우울’과 ‘유쾌’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봅시다. 스피노자는 ‘우울’을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슬픔의 정서”로, ‘유쾌’를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로 정의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울’과 ‘유쾌’는 정신에만 관계된 일이 아니라 ‘정신-신체’ 모두에 관계된 마음 상태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우울증은 왜 생길까요? 그저 우울한 생각(정신)을 많이 해서일까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울은 반드시 우리의 신체에 억압을 가하는 외부적 조건(가정‧학교‧군대‧직장…) 때문에 발생합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도 종종 기쁜 생각(정신)을 하지만 너무 쉽게 우울에 빠집니다. 반대로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도 종종 슬픈 생각(정신)을 할 수 있지만 좀처럼 우울해지지는 않습니다. 이는 우울이 단지 정신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조건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체를 활성화하는 곳(놀이터‧체육관‧여행…)에서는 좀처럼 우울증이 발생하지 않지만, 신체를 과도하게 억압하는 장소(학교‧군대‧직장…)에서는 쉽게 우울증이 발생하곤 합니다. 우리의 우울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문제는 오히려 신체적 문제에 따른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폭력적인 가정‧학교‧군대‧직장에서 가해진 ‘신체’적 억압은 필연적으로 ‘정신’적인 슬픔을 촉발하게 되니까요.

      

 ‘신체’적 억압이 촉발한 ‘정신’적 슬픔(분노‧증오‧억울함…)이 무의식적으로 뒤엉킬 때 발생하는 복잡하고 모호한 슬픔, 그것이 바로 우울의 정체입니다. 이제 '우울'로부터 벗어나 '유쾌'로 나아갈 하나의 방법을 얻게 됩니다. 신체를 활성화(기쁨)하는 일입니다. 우울은 근본적으로 신체의 억압(비활성화 : 슬픔)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신체를 활성화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쾌감’과 ‘유쾌’입니다. 둘 모두 신체를 활성화하지만 ‘쾌감’은 우울의 치유는커녕 더 큰 우울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우울’을 치유할 신체의 활성화는 오직 ‘유쾌’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쾌감’과 ‘유쾌’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스피노자는 ‘쾌감’을 “인간의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자극을 많이 받을 때” 느껴지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유쾌’를 “인간의 모든 부분이 자극 받을 때 느껴지는”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자위‧게임은 전형적인 ‘쾌락’이고, 섹스‧운동은 대표적인 ‘유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위와 게임은 왜 '쾌감'일까요? 이것은 분명 신체를 활성화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부분(성기와 눈‧손가락)만을 활성화하죠. 자위를 할 때는 성기만이 활성화(기쁨)되고, 게임을 할 때는 눈과 손가락만이 활성화(기쁨)되니까요. 



 하지만 섹스와 운동은 다르죠. 사랑하는 이와 섹스할 때 신체의 한 부분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만약 그런 섹스를 한다면 그것은 자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온 몸으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이 자극되며 기쁨(활성화)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좋아하는 운동을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죠. 그때 우리는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이 자극되며 기쁨(활성화)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이 자극되며 느껴지는 기쁨(활성화)이 바로 '유쾌함'입니다.  

   

 바로 이 '유쾌함'이 바로 우울을 치유할 묘책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아무리 깊은 우울이 찾아와도 사랑하는 이와 온 몸으로 사랑을 나눌 때 우울은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지 않았나요? 사랑하는 이와 온 몸으로 나눈 섹스는 언제나 삶을 더욱 활력적인 만들어줄 유쾌함을 선물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깊은 우울이 찾아와도 땀이 흠뻑 날 정도로 달리고 나면 우울은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지 않았나요? 숨이 턱까지 찰 정도의 운동은 언제나 삶을 더욱 활력적으로 만들어줄 유쾌함을 선물해주기 때문입니다. 

     

 ‘우울’을 너머 ‘유쾌’로 가는 길은 '정신'에서 눈을 떼고 '신체'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몸 일부가 아닌 온 몸의 활성화! 이것이 유쾌한 삶의 비법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우리는 모든 육체적 고통을 무시해도 된다왜냐하면 심한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지속 기간이 짧으며우리 살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은 경미한 통증만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쾌락 에피쿠로스  

   

 운동하세요! 우울증에서 벗어날 간명한 답입니다. 이 간명한 답에도 불구하고 왜 우울한 이들은 운동을 하지 않을까요? 운동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울한 이들은 왜 고통을 피하려 할까요? 단순히 힘들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운동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고통’와 ‘우울’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고통’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자극받을 때 슬픔이고, ‘우울’은 모든 부분이 자극 받을 때의 슬픔입니다.

 

 우울한 이들은 모든 부분에서 슬픔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다른 슬픔도 모두 피하고 싶어 합니다. 이미 슬픔(우울)이 가득한데 또 다른 슬픔(고통)이 더해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상태인 겁니다. 이것이 우울한 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는 이유죠. 운동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니까요. 하지만 모든 슬픔이 필연적으로 더 큰 슬픔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슬픔(고통)은 잠시의 슬픔 뒤에 큰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이 그렇지 않나요? 사랑은 고통이죠. 나와 삶의 규칙이 다른 이를 품는 사랑은 고통스럽죠. 하지만 그 고통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죠.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큰 기쁨을 줍니다. 운동 역시 그렇습니다. 우울에 잠식당한 이들에게 몸을 움직이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우울을 치유할 유쾌함을 선물하니까요. 운동의 고통은 우울을 더할 슬픔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이내 유쾌함으로 전환될 기쁜 슬픔입니다. 우울한가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움직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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