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후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것인가?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이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무게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즐거운 학문』 프리드리히 니체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할 걸” “대학 때 배낭여행을 해볼 걸” “그때 그 아이에게 고백해볼 걸”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후회하며 살죠. 후회, 우리네 삶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 중 하나입니다. 삶의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후회는 그 삶의 끝자락까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건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었는데” 죽음의 문턱 앞에선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것이니까요.
이 후회만큼 우리네 삶에 유해한 감정도 없습니다. 후회는 삶의 곰팡이입니다. 크고 작은 후회를 할 때 우리네 삶은 눅눅해지고 음습해지지요. 그런 후회의 마음을 긴 시간 끊어내지 못할 때, 삶의 이곳저곳에 곰팡이가 슬게 됩니다. 크고 깊고 잦은 후회에 잠식당한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잘 돌보려 하지 않게 되곤 합니다. 이는 심하게 곰팡이가 퍼져버려 더 이상 손쓸 수 없게 되어버린 방을 그저 닫아버리게 되는 마음과 비슷할 겁니다.
후회라는 곰팡이는 쉬이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후회의 가장 큰 문제이지요. 누구도 후회하고 싶어서 후회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후회가 삶을 좀 먹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니까요. 엄습해오는 후회를 어찌할 수 없어서 후회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유해한 동시에 끈질긴 이 곰팡이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요? 니체라면, ‘영원회귀’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할 겁니다.
‘영원회귀’는 무엇일까요?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기”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의미입니다. 난해한 이야기이니 조금 풀어서 이야기해볼까요? 세 차원의 ‘나’의 삶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100년 전의 ‘나’의 삶(이미 지난 삶), 현재의 ‘나’의 삶(지금 살고 있는 삶), 100년 뒤의 ‘나’의 삶(앞으로 살 게 될 삶). 과거의 ‘나’의 삶이 끝나면, 현재의 ‘나’의 삶으로 이어지고, 그 삶이 끝나면 다시 미래의 ‘나’ 삶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영원회귀는 세 가지 차원(과거-현재-미래)의 ‘나’의 삶이 원환구조로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볼까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허겁지겁 출근하고 직장에서 정신없이 일하다가 퇴근해서 의미 없는 동영상을 보며 맥주 한 잔을 하고 잠들었다고 해보죠. 니체의 영원회귀에 따르면, 이는 단순히 현재의 오늘 하루 ‘출근-퇴근-맥주-잠’을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100년 전 삶에서 오늘이었던 날 역시 정확히 그렇게 반복되었을 것이고, 앞으로 살게 될 100년 뒤 삶에서 오늘이 될 날 역시 정확히 그렇게 반복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의 ‘영원회귀’입니다.
말하자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종의 윤회輪廻인 셈입니다. 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철학자의 말이 아니라 종교인이나 무속인의 황당한 미신같은 이야기로 들릴테지요. 하지만 그런 거부감을 잠시 내려놓고 영원회귀가 실제로 우리네 삶에 펼쳐진다고 믿어봅시다. 그 믿음이 영원회귀의 태도가 후회하는 삶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겁니다.
생각해보면, '영원회귀'는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 즉, 죽음으로도 지금 내 삶이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 아닌가요? 니체의 말처럼, 그것은 “최대의 무게”로 우리의 모든 행위 위에 얹힐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우리의 오늘 하루를 돌아볼까요? 우울한 마음을 억누르며 출근을 하고, 직장에서 인격적 모멸을 견디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퇴근을 하고, 삶의 무의미를 달래려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잠들었던 하루였습니다.
그 하루는 오늘 하루로 끝나게 될까요? 니체의 논의(영원회귀)에 따르면, 그 하루는 결코 끝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가 될 겁니다. 이보다 무서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요? 영원회귀를 진짜로 믿을 때, 비루하고 무의미한 불행한 하루는 그저 지나가는 하루가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이제 왜 영원회귀가 “최대의 무게”로 우리네 삶을 짓누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원회귀', 즉 우리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마저도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현재의 작은 행동 하나도 과거-현재-미래로 영원히 반복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니체는 이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려는 것일까요? 즉, ‘한 번 불행한 삶은 영원히 반복된다.’라는 절망을 안기려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절망’보다 ‘희망’에 가깝습니다. 정확히는 ‘희망’을 선택하라는 ‘겁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달리 말해, 늘 용기없어 행복을 유예하는 우리들에게 지금 당장 행복을 선택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불행할 것이라고 “최대의 무게”로 겁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받아들인다면, 즉 그 “최대의 무게”를 짊어진다면 우리네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출근-퇴근-맥주-잠’을 반복하게 될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만족한다면 그는 그렇게 오늘 하루를 보내겠지요. 하지만 만약 지금 자신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끔찍하리만치 싫다면 어떨까요? 그는 당장 내일 사표를 쓰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떠날 겁니다. 비로소 그때 영원히 반복될 끔찍한 불행을 끊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영원회귀'의 백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하는 선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가장 유쾌하고 기쁜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 이는 희망적이지만 동시에 무시무시한 겁박이기도 하죠. 지금 내가 유쾌하고 명랑한 선택한다면 그 선택이 영원히 반복되지만, 반대로 내가 우울하고 침잠된 선택을 한다면 그 선택 역시 영원히 반복될 테니까요.
니체의 말처럼, '영원회귀'는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입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은 우리네 삶의 최종적이며 영원한 확인이고, 이는 영원히 봉인되어 버립니다.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왔던 이에게 지금 사랑을 고백하면 그것은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으로 우리네 삶이 될 겁니다. 반대로 직장에서 모욕적인 처우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 비루하게 사는 선택을 하면 그것 역시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으로 우리네 삶이 될 겁니다.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야 나가야만 하는가?” 니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후회하며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오늘 이 지긋지긋한 하루도 곧 끝날 거야”라는 삶의 포기, “내일은, 다음 달은, 내년은 뭔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 아니던가요? 그 삶의 포기와 막연한 기대 때문에 지금 유쾌하며 끝내 행복해질 선택들을 유예하며 사는 것 아니던가요?
후회하는 삶을 끝내고 싶다면, ‘영원회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사실이냐 아니냐는 묻지 맙시다. ‘삶이 진짜로 영원히 반복되는가? 아닌가?’ 이는 전혀 중요한 질문이 아닐 겁니다. 누구보다 영민했던 니체가 ‘영원회귀’ 같은 종교적 레토릭을 실제로 믿었을 리 없습니다. 니체는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면 최선의 행복이 펼쳐질 것이며, 반대로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최악의 불행이 펼쳐질 것이라는 겁박의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영원회귀'는 종교적 레토릭이기보다 인문적 레토릭인 셈입니다.
'영원회귀'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내 삶의 크고 작은 선택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질문을 통해 매순간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때, 후회 없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옅은 미소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한바탕 신나게 잘 놀다가 간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그 유일한 같음을 구성하는 것이다. 회귀, 그것은 생성 자체의 동일하게 - 되기이다. 따라서 회귀는 유일한 동일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차적 역량에 해당하는 동일성, 차이의 동일성일 뿐이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가요? ‘차이’를 만들며 살아가세요. '영원회귀'를 따라 삶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차이’를 만드는 삶일 겁니다. 어제와 ‘나’와 차이 나는 ‘나’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후회 없는 삶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식일 겁니다. 누구보다 니체를 잘 이해했던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영원회귀'’에 입각해 살아갔을 때 결코 어제와 같은 ‘나’로 머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공무원의 삶을 후회하는 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가 '영원회귀'에 입각해 삶을 살려고 했을 때, 그는 공무원으로 계속 머물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지긋지긋한 공무원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표를 쓰고 세계일주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그 공무원은 화가나 가수 혹은 소설가라는 존재로 생성되어 ‘차이’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영원회귀'는 분명 반복(동일성)입니다. 하지만 그 반복은 동일성(공무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화가‧가수‧소설가…)의 반복입니다. '영원회귀'의 반복은 기존의 나(공무원)와 ‘차이’ 나는 존재(화가‧가수‧소설가…) ‘-되기’의 반복입니다. '영원회귀'에 따라 산다는 것은 기존의 ‘나’와는 크고 작은 ‘차이’를 만드는 선택들을 해나간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겁니다.
오직 그렇게 산 이들만이 죽음 앞에서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런 ‘후회 없는 삶’은 반드시 누군가의 삶 속에 작은 등불이 되어 다시 영원히 회귀할 겁니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는 다시 영원히 ‘반복’될 겁니다.